『일본문화사신론』(홍윤기 저) 자료발췌
P6 - 신도는 제천의 고속
저자의 눈을 다시 한번 번쩍 뜨게 해준 것은 도쿄대학 사학과 구메 구니다케 교수의 역사 연구론이 실린 사학회잡지였다. 이 역사 연구 학술지에는 구메 구니다케 교수의 [신도는 제천의 고속]이라는 제하의 역사론이 3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구메 구니다케 교수는 이 논문을 통하여 일본 근대의 역사학자로서 학문적 양심을 굽힘없이 사실대로 써냈다. 일본 왕실의 중심신앙은 하늘의 천신들을 받드는 신도이다. 그와 같은 하늘의 천신들을 그들의 조상신으로 떠받들게 된 일본신도의 본래 일본의 것이 아니고 상고시대 고조선에서 단군을 신앙하던 고조선의 조선신들에 대한 천신 제사양식이 고대 일본으로 건너왔다는 사실을 고문헌들을 제사하며 구체적으로 논증했다.
한민족에게는 상고시대로부터 천신, 일월신 등을 모시는 신앙체계 위에서 주몽의 모신인 부여신이며 동명신, 구태신, 혁거세신 등 천신과 국조를 신앙하는 국가신 제사 체계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져 왔던 것이다. 바로 그러한 한민족 고래의 천신과 국조신 신앙체계를 답습한 것이 고대 일본 왕실의 신앙이 되었음을 구메 구니다케 교수가 명약관화하게 밝혔다.
구메 구니다케 교수는 이를테면, “일본의 신도는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예의 무천 등등, 고조선 당시의 천신 제사인 제천의식을 바탕으로 일본왕실에게 이루어졌다”고 진솔하게 시인하며 그 사실을 19세기 말의 일본 사회에다 철저하게 공헌했다. 그뿐 아니라, 고조선에서 임금이 하늘의 신에게 제사드리는 국가의 제천대전은 곧 일본왕실에서 천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신상제라는 국가의 큰 제사를 거행하는 일로 옮겨왔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일본 천황가 사당인 이세신궁에서 천황이 직접 찾아와서 천신에게 제사드리고 있는 “이세신궁의 신상제 제사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에게 제사 지내는 것이 아니고 천신을 제사지내는 것이다”라고 단정했다. 즉 일본왕실에서도 고조선의 한신 등 조선신들을 제사 모셔오고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놀라운 내용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구메 구니다케 교수의 연구론 [신도는 제천의 고속]은 지금까지 일본 천황가의 소위 ‘황국신도’를 뿌리째 뒤엎어버린 엄청난 학술적 고증이었다.
P8 - 이세신궁의 유래
이세신궁이 본래는 신라 천일창 왕자가 한민족이 상고시대부터 조상신으로 섬겨온 곰신의 신주를 모셔다가 세운 터전이었다. 일본 역사책에도 “천일창 왕자가 신라로부터 곰신단을 일본땅으로 모셔왔다”고 밝혀져 있다. 더구나 신도가들이 자랑스럽게 내세운 이세신궁의 신궁이라는 사당 호칭조차 일본에서 최초로 발상된 것은 아니다. 일찍이 신라에서는 “소지왕 9년, 박혁거세 탄생지인 나을에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를 제사모시는 사당으로서 처음 신궁을 세웠다”. 이세신궁의 신궁 명칭은 신라에서 호칭하던 당시의 사당명칭을 답습했던 것이다.
P20 - 일본 개국신화는 조선 개국신화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
당시 일본의 대표적 민족학자였던 도쿄도립대학의 오카 마사오 교수의 다음과 같은 연구발표는 일본인들에게 충격과 동시에 큰 주목을 끌게 되었다.
“조선의 단군신화를 보면 천신인 환인이 아들 환웅에게 ‘3종의 보기’를 주어 신단수 아래로 내려가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우게 한 조선신화를 본뜬 것이, 일본신화의 ‘3종의 신기’였다. 일본신화는 단군신화와 가야신화를 모태로 삼아 발생했다”라는 단정이었다. 그 뒤를 이어 일본에서는 민족학자뿐 아니라 역사학자며 신화학자들도 줄지어 일본 개국신화가 단군 개국신화, 가야 김수로왕 개국신화, 주몽의 고구려 개국신화를 모작했음을 밝히게 되었다.
P27 - 히모로기는 신라 이두식의 한자어
김석형 교수는 일본 역사에서 말하는 신주를 모신 대나무제 신단인 “히로로기는 실로 ‘신궁’ ‘신사’를 의미하며, 요컨대 ‘무’의 ‘사당’이다. 후세에 이르러 조선에서는 천시되었으나 일본에서는 계속하여 국가적인 보호를 받아왔다. 신라에 신궁이 있었다는 것은 [삼국사기]에 명문이 있다. 이 당시 신라에서도 무의 사당은 종묘로서 국가적인 숭배의 대상이었다. 일본의 신궁 신사의 뿌리가 샤머니즘에서 유래한다는 것은 상식이며 그것은 어디서나 공통이다”라고 지적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일찍이 18세기 일본 역사 고증학자 도 데이칸의매우 중대한 주장이다. 그는 히모로기를 가리켜 “무릇 히로모기라는 말은 신라어니니라”라고 했다. 여기서 히모로기는 당시의 신라 이두식의 한자어 표기를 그대로 쓴 것이다. 물로 뒷날에 와서 히모로기라는 한자어 표기가 새로 등장했다. 즉 신라의 ‘무’의 ‘사당’이 일본에 건너가서 일본 왕실의 신궁이 되었음을 도 데이칸도 아울러 입증하여 주고 있는 셈이다.
P28 - 한반도로부터 일본으로 건너간 기마민족의 발자취
일본 정복자였던 오진 천황의왕릉의 배총으로 알려진 마루야마 고분에서는 한국에서 건너온 마구들이 출토된 바 있다. 오진천황의 지배의 터전이던 가와치땅의 오진천황릉 터에서 인동초 문양으로 정교하고 아름답게 투조해서 만든 금동제로 조각된 아름다운 말안장 장식인 안교가 나왔다. 곧 그것은 기마민족의 왕성했던 말문화의 발자취가 현해탄을 건너가서 일본을 정복했다는 것을 고고학적으로 고증하는 한 실례이다.
P30 - 한반도 정복자들의 기마민족국가 학설
이노우에 미쓰사타 교수는 에가미 교수의 기마민족학설, 즉 조선의 기마민족이 조선땅으로부터 규슈 땅에 건너와서 일본의 천황이 되었고, 계속해서 규슈에서 일본 본토인 아니와쓰로 들어가서 나니와쓰와 야마토 지역에서 천황이 되었으며, 한반도에서 계속해서 일본으로 조선인들을 불러들여서 강력한 정복왕조 국가를 만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노우에 교수는 “에가미 교수의 기마민족의 일본 정복이 BC 2C 경이라면 타당하다. 그러나 에가미 씨의 한국기마민족의 규슈 침략이 4C라면 시기적으로 걸맞지 않는다”고 했다.
이상과 같은 것은 어디까지나 고대의 무덤속에서 캐낸 유물들을 가지고 고고학적인 견지에서 역사의 내용을 규명한 것이다. 즉 고분시대의 매장 유물들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역사와 문화의 발자취를 밝혀주게 되는 것이다. 에가미 나이오 학설의 정복의 시기 4C 등 역사 콘텐츠에 대하여 와세다대학 사학과 미즈노 유 교수의 주장은 왜나라 역사에 등장하는 외국으로부터 침입하여 온 기마민족으로서의 일본 정복왕조는 가야계의 스진왕조가 아닌 백제계 닌토쿠왕조라고 주장했다.
P40 - 천황가의 황조신은 본래 천조대신이 아닌 고황산령존
우에다 마사아키 교수는 “고황산령존이야말로 천조대신보다 원초가 되는 신이었다”고 단정했으며, 이 저서에서 “고황산령존의 신앙은 일본의 농경문화가 도입되어 전개되던 과정에서 육성된 것이었다”고 밝혔다. 즉 이는 조선으로부터 건너온 벼농사와 더불어 농업신으로서의 드높은 신분의 위상을 시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우에다 마사아키 교수는 “일본 고대사 [고사기]에서는 고황산령존을 고어산소일신으로도 부른다. 또한 다른 이름으로는 드높은 나무의 신인 ‘고목신’으로도 부른다“고도 지적했다. 우에다 마사아키 교수가 지적한 ”고목신이란 도대체 무슨 신인가. 그것은 신에 의하여 신체목이라는 신격화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고황산령존이 천손강림하던 당시에 ‘하늘의 히모로기를 가지고 중원땅에 내려와서 나의 손자를 위하여 제사를 모셔라’고 명령했다는 것이 [일본서기] 제2의 1서에 보이고 있고, [고어습유]에도 고황산령존을제사모시느라 히모로기를 세웠다“고 했다.
다시 쉽게 설명하자면 우리 고조선에서 큰 나무로 신이 깃들이는 솟대를 세우고 제사모신 유습이 고대 일본으로 전해진 조선 고대 신도 제사의 히모로기 천신 제사 종교 제례이다. 신체목은 조선시대 ‘강릉 단오굿’으로도 오늘에까지 강릉땅에서 전해져 오며, 그런 대규모의 신체목 제례의식의 유습은 일본 교토의 ‘기온마쓰리’에서도 동일하다.
특히 조선 삼국시대부터 한민족은 신성한 지역인 소도에다 영고를 단 큰 나무를 세우고 천신 제사를 지내왔다. 일본 왕실 신상제 제사에 바로 그 모습이 오늘에도 고스란히 전해 오고 있다. 즉 삐주기 나뭇가지에 방울을 매달고 고수를 북을 치며 천황과 더불어 신상제 제사를 지낸다.
P55 - 조선 청동제품의 일본 유입
도쿄대학 사학과 이노우에 미쓰사타 교수도 그와 같은 발자취에 대하여 일본의 옹관묘에서 출토된 다수의 청동기 제품은 일본인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주로 조선으로부터 유입된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 청동제품에서 왕실의 상징인 ‘삼종의 신기’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밝혔다. 또한 이노우에 미쓰사타 교수는 청동 제품들인 동검, 동모, 청동거울과 옥류 등은 “야요이시대 족장의 분묘에서 볼 수 있는 ‘3개의 보기’와 관계가 있는 것이리라. 왜냐하면 이런 풍습은 4세기 초엽에 시작되는 고분시대에 들어와서도 처음의 1세기 정도 전해졌고 더구나 이 고분시대 초엽에 국가 수장으로서의 천황가의 지위가 확립되었다고 여겨진다”고 했다.
이와 같은 이노우에 미쓰사타 교수의 주장은 천황가가 야요이시대에 청동기 문화를 한반도로부터 일본으로 가져온 도래인들에 의하여 형성된 것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이노우에 미쓰사타 교수는 에가미 나미오 교수의 [기마민족국가]설을 바탕으로 다음처럼 논술했다.
“기기의 오진 대목과 그 밖의 기사에서 하타씨의 조상인 유즈키노키미는 120현의 인부들과 야마토노아야씨의 조상 아치노오미가 당류 17현을 거느리고 건너와 일본에 귀화한 것을 기사로 쓰고 있다. 그 이후에도 얼마나 많은 귀화인이 일본에 와서 토착했는지는 기나이 지방 사람들의 씨성을 쓴 [신찬성씨록]의 제번 사람들을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만약 당시의 일본의 지배자가 한반도와 대륙 지역으로부터의 귀화인들과 전혀 혈통상 관계가 없었다고 했다면 그처럼 수많은 귀화인이 오진시대부터 계속하여 건넌왔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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