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산도 입도 수기

저는 STB상생방송으로 증산도를 처음 접하게 되었습니다.

천부경81자 2014. 9. 6. 20:49

 

저는 STB상생방송으로 증산도를 처음 접하게 되었습니다.

혼자서 증산도에 대해 알아보고 호감을 갖고 있다가 단주를 지니고 있고 싶어서 대구대명 도장으로 전화를 하였습니다.

 

택배로 단주를 좀 보내달라고 했는데, 전화를 받으신 분이 직접 찾아왔습니다.

도장에서 상주를 하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분과 3시간이 넘게 이야기를 하고 인연이 닿아 입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내의 신앙 반대로 입도를 못 하고 2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도장에 책임자분도 바뀌었는지, 처음 보는 분이 찾아왔습니다.

그분과 이야기가 잘 통하여 오랜 시간을 대화하고 다시 입도공부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어렵게 다시 마음을 먹은 터라 이번에는 꼭 입도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고, 이렇게 입도까지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족한 것이 많지만, 봉청수와 수행, 기도를 생활화하고, 진리서적을 탐독하여 사람을 살리는 큰 일꾼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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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제주도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부모님께 걱정을 많이 끼치며 자랐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 할 때 까지는 절에서 스님들과 생활을 많이 했고 그 덕에 불교 교리를 접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제주에서 18년 동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취미로 익혔던 서예공부를 하려고 20년 전에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동안 서예대전, 국전, 국제전, 입선, 특선 수상을 거치며 마음껏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부할 때는 즐거웠으나 대한민국 서예계 운영진들의 내막을 알게 되면서부터 회의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서예인들의 등용문을 움켜쥔 몇몇 기득권자들의 온갖 비리와 추태에 흥미를 잃고 혼자 조그만 학원을 경영하며 생활을 했습니다.

IMF로 인한 사회경제의 어려움과 맞물려 학원운영의 부실, 건물주의 부도로 인한 막중한 손실, 엄청난 시련을 겪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자식들은 직장 따라 독립들을 해줘서 우리 부부 둘이서 버텨 나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온갖 기도도 많이 해봤습니다.

집사람 말에는 기도하러 서울 올라왔나 싶을 정도로 같이 다녔습니다.

양쪽집안 조상님들이 우리 도 닦으라고 맺어주신 것 같다는 말까지..

제주에 있었으면 밤낮 술대접 받다 이미 저 세상 사람 됐을 거라고.

 

그렇게 수없이 기도하던 중 아내의 권유로 대순진리회에 입도한 후 3년이란 세월 속에서도 뭔가 채울 수 없는 욕구와 진리체계를 알고 싶었으나 흥미를 느끼질 못해 쉬던 중, 케이블 TV에서 상생방송을 보게 되었습니다.

대순에서 듣지 못하던 우주1, 생장염장, 선천, 후천, 상생, 상극 하추교역기, 원시반본, 어떻게 같은 상제님 모시는 도장에서 이렇게도 다른가 싶었습니다.

 

그래서 114 안내 전화를 통하여 고양마두도장을 찾게 되었습니다.

2012924일 입문하여 천지성공, 월간 개벽지, 도전, 개벽실제상황 등을 보면서 마음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늦었지만 2013년 입도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하나라도 더 알려주시려는 수호사님, 포정님께 감사드립니다.

이제 열심히 기도하고 수행해서 하추교역기 대환란이 오기 전에 인연 닿는 사람 하나라도 더, 사람 살리는 사업에 동참하고 싶습니다.

 

상제님이시여! 저희 조상을 잘 보살펴 주시고 저를 척신의 손에서 건져 주시어 도체 6임도수를 무사히 완수하여 상제님 사업에 동참 할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시옵소서.

상제님, 태모님, 태사부님, 사부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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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생이 찰나인 것을. 인연이 아닌 십년의 결혼생활 청산 후 노모와 두 아들과 함께 살아온 세월이 종교 편력의 시간들이었다.

 

생사가 고라면, 생사가 죄악이 아닐까?

참회문을 쓰라면 제 행이 하나도 예외 없이 회한으로 채색 될 것 같다.

삶의 고통이 크면 클수록 사람은 자기 내면을 향하여 성찰과 ?’ 라는 존재의 화두를 던지는 것 같다.

 

진리는 가장 수승한 하나일진대, 문과 길은 참으로 많다.

이혼 후 정신적 고통과 방황은 겪은 자만이 알 것이다.

휴가 및 휴일에 등산과 여행이 최고의 위안이었다.

까불고 웃으며 나를 따르는 예쁜 두 아들 녀석들에게 그토록 슬프고 예쁘고 미안한 마음은 그들이 전역과 졸업할 때까지 내 마음속 깊이 그림자가 어둡게 드리워져 있었다.

 

서른 초반 나이에 만난 한 스님이 있었다. 최초의 정신적 스승이었다.

일어난 곳을 보라.”는 말 한마디에 석존이 밝힌 그 자리를 알아차렸다.

그리고 한 생각 일으키는 것과 하늘 한 번 쳐다보는 것과 그 무게가 어떠냐?” 는 말에 같습니다.”하고 그 후 유식 공부에 빠졌었다.

 

만유가 식이 전변되어․․․․․․.” 실재를 공으로 설파하는 가 보다.

모든 것이 변화하지 않는 것이 없는데, 변화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그 하나를 체로 삼고 공부라는 것이 참선이다.

그러나 교만인지, 생활의 쫓기는 것 때문인지, 나의 두 친구가 찾아왔다. 주신과 농신이다.

 

그러던 중 대순진리회를 만났다.

이곳에서 상제님을 만났고, 태을주를 만났고, 태을주의 신비도 경험했고, 색다른 단어들을 만났다. 선천, 후천, 신명, 귀신 등.

 

내가 아는 마음에는 문도 문틀도, 길도 없는 것이었다.

하나, 여기서는 심야자 귀신지추기야 문호야 도로야.”라고 해서 색다른 뉘앙스를 느꼈다. 하지만 귀신에 대한 의문과 마음에 대한 설명이 미진함도 있었지만, 여기에서 귀신과 역과 신명에 대해 알게 되었다.

타종교를 길가의 잡초 밟듯이 밟고, 개벽기때, “종교를 따르지 않으면, 다 괴질에 걸려 죽고, 종교인은 사악해서 의사는 생명을 가지고, 장난했기 때문에 죽는다.” 했다.

종교는 결국 사람의 피조물이라고 단정짓고, 나는 또 나오고 말았다.

 

같은 개념의 말을 차별성과 수승함을 표방하기 위해 예를 들어 전도, 포덕, 포교 등등.

수승하다는 것은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수승한 것 일 뿐.

진실로 수승한 것은 대비도, 비판도 배제하는 게 아닌가?

 

앞으로 도나 종교 같은 것으로 나에게 접근하는 자는 용서치 않겠다고 결심 했으나, 텅 빈 조용한 마음은 그냥 있지 못 하고, 또 움직이고 있었다.

 

 

죽기전 영혼의 청소와 진리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생각하다가 인연이 있어 전화한 곳이 기억으로는 대전의 증산도 본부였다.

 

천지성공을 택배로 받고, 대구 대명도장을 찾고도 세월만 보냈다.

 

예전 천지개벽경과 개벽실제상황을 읽고, 썩어가는 자연과 환경, 타락되어가는 인간의 도덕성, 분실되어버린 본성을 걱정했습니다.

 

인개벽과 자연개벽의 역사적 필연성과 당위성을 깊이 생각해 보았고, 신명공사란 말에서 신을 다시 생각했다.

신이 보일 듯 말 듯, 알 듯 말 듯. 그리고 신이 이치를 밟고 다닌다는 것.

신 속에 신학의 신을 대입해도 튕겨져 나오고, 심을 대입해도 튕겨져 나온다.

 

도장에 가끔 가서 책을 사서 보면서도 입도하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상생방송 7주년 기념행사 참석차 태을궁에 갔었다.

행사 중 종도사님의 말씀을 들었다.

 

원죄를 상극한마디로 파괴시킬 때, 해변에서 먼 수평선을 바라보듯 한 시원함을 느꼈다. 또 영혼관은 불교의 유식사상에 더 잘 되어있다는 말씀! 당신의 그 위대한 겸허로 인해 대양 깊숙이 가라앉는 나의 영혼을 느꼈다.

 

또한 근본공부를 너무 깊이 파지 말고, 행을 통한 수행공부를 강조하셨다.

후천의 종교는 실천종교라고 조용히 받아들였다.

이 점은 나의 큰 단점이기에 부끄럽고 나 자신에게도 미안함을 느꼈다.

 

환갑을 넘기고 진갑의 철봉에 매달린 너덜하고 초췌한 나의 모습.

늦다! 늦다! 더 없이 늦다! 좋은 시절 다 보내고.

하지만 누에에 비유를 들고 옳다! 옳다! 남은 복이 더 크다고 하지 않았던가!

말 잘 하는 자, 아는 것이 많은 자, 도 닦기 어렵다고 했던가. 큰 바보가 되자!

돌아와서 도적부를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