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제님에 대하여

강증산 상제님의 생애-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고난과 인간체험, 수행과 명상생활

천부경81자 2011. 7. 30. 11:16

 

 

 강증산 상제님의 생애-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고난과 인간체험, 수행과 명상생활

 

고난과 인간 체험
 강증산 상제님이 걸으신 삶의 길은 말 그대로 고행이었다.
 
 태어나신 초가집은 지붕을 제때에 이지 못해 천정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을 정도였고, 사립문도 없이 작은방 하나에 부엌 하나였으며, 부엌은 볏짚으로 두르고 문은 대나무를 엮어서 만들었다고 전한다.
 
 너무 가난해서 상제님은 태어나면서부터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외가와 진외가(陳外家)로 자주 옮겨 다니며 사셨다. 그로 인해 여러 증언자들이 상제님의 생가를 서로 다르게 말하고 있어, 생가를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한다. 가슴 한쪽이 진하게 아려오는 대목이다.
 
 열 살이 넘어 가족이 서산리 외가에 가서 얼마동안 사실 때, 부친은 객망리 앞에 작은집(소실)을 얻어 주막을 경영하였다. 상제님은 홀로 계신 모친을 위하여 송산(松山) 도득골에 올라 솔가지와 낙엽을 긁어다가 아궁이에 불을 때기도 하셨다.
 
 열다섯 살 무렵에는 가난한 집안 살림을 돕기 위해 글공부를 중단하고 짚신을 삼아서 팔기도 하시며 사방으로 유랑하셨다. 정읍 남이면 거슬막에서 머슴으로 일하며 보리를 거두기도 하였다. 그런가하면 정읍 내장산 아래 부여곡(夫余谷)에서는 산판꾼이 되어 나무를 베셨다.
 


 머슴, 산판꾼이라면 당시 하인이나 노비들이 하던 일이었다. 그토록 큰 조화권능을 가지신 분이 왜 이처럼 가난하고 천한 삶을 사셔야 했을까?
 
 인간에게 있어 가장 큰 고통 중 하나가, 벗어날 길 없는 빈곤과 비천한 신분 때문에 설움을 당하는 것이리라. 그것은 자신의 능력이나 의지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주어지는 것이 아닌가.
 
 훗날, 지난 수천 년 동안 누적된 인간과 신명의 원과 한이 하늘과 땅에 가득 차서 천지가 폭파될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시며 천지를 뜯어고치신 강증산 상제님! 상제님은 선천 인간의 아픔과 비애를 속속들이 체험하심으로써 창생을 건지는 진정한 구원의 법방을 마련하기 위해 스스로 그 길을 택하셨던 것이다.
 
 이렇듯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도 상제님은 지혜가 밝으시고 도량이 관대하시며 일동일정이 매우 정중하셨다. 그리고 틈틈이 고부 궁동면 도천리(宮洞面道川里) 종문(宗門)에 가서 여러 서적을 읽으셨다.
 
 
 수행과 명상 생활
 강증산 상제님의 생애에서 또 특이한 점은 어린시절부터 서책을 가까이 하셨을 뿐 아니라 늘 산하정기를 호흡하며 수행과 명상을 하셨다는 사실이다.
 
 아홉 살 때인 기묘(己卯, 1879)년에는 부친께 청하여 집 뒤쪽에 초막을 짓고 홀로 거처하셨다. 외부 사람들의 출입을 금하고 하루건너 암꿩 한 마리와 비단 두 자 다섯 치씩을 구하여 들이셨다. 무엇을 하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누구도 감히 여쭈어볼 수도 없었다. 그리고는 두 달 후에 홀연히 어디로 나가셨는데, 방안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상제님은 종종 시루산에서 매봉과 망제봉, 동죽산을 타고 두승산에 올라 고산준령을 향해 크게 고함을 치셨다.
 
 밤이면 큰시루산에서 작은시루산으로 뛰어다니며 산하정기를 호흡하고, 산 속의 고요에 젖어 깊은 명상에 드셨다. 그러다 집에 돌아오시면 초막에서 조용히 사색에 잠기셨다.
 
 이후 이곳저곳을 유랑하시다가 열아홉 살 되던 해에는 다시 객망리로 돌아와 사시면서 시루산에서 큰 소리로 진법주(眞法呪)를 읽으며 공부하셨다. 시루산에는 큰 소나무가 우거지고 학이 수두룩이 날아들었다.
 
 수년 동안, 상제님은 객망리에서 진독골(盡讀谷)로 돌아 샘이너머를 거쳐 시루산 상봉을 주야로 오르내리셨다. 그때 근동 십여 리 산천이 다 울리도록 크게 소리를 지르셔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마을 사람들이 밤에는 집 밖에 나가기를 두려워하였다.
 
 또 하루는 모친이 길어 오신 물을 동이에 부으시더니, 마당 가운데다가 짚으로 삼발 모양의 받침을 만든 뒤 그 위에 물동이를 올려놓으셨다. 그리고 수많은 백지에 글을 써서 그 앞에 잔뜩 놓으시고 저녁 내내 소리를 내어 천지에 기도하셨다. 기도가 끝나자 글 쓴 종이를 청수 위에서 불사르시고는 그 청수를 동이 째 다 들이키셨다.
 
 여기서 혹자는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본래부터 상제님은 하늘과 땅, 만물의 속을 환히 들여다보셨을 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까지도 다 꿰뚫으셨던 분이다. 그런데 왜 상제님은 이렇게 어려서부터 늘 수행과 명상을 하셨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1부의 말미에 가면 자연스럽게 깨달아질 것이다.
 
 
 모든 것을 다 담고도 남느니
 열아홉 살 때, 상제님은 시루산에서 공부하시며 스스로 호를 시루 증 자 뫼 산 자, ‘증산(甑山)’이라고 하셨다.
 
 이‘증산’이라는 도호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깃들어 있다. 시루는 본래 곡식을 넣고 떡을 찌는 질그릇이다. 여기에는 천지의 가을철을 맞아 인간으로 오신 상제님께서 선천의 미성숙한 모든 문화를 한데 모아, 마치 시루에다 떡을 찌듯 푹 익혀서 성숙된 문화를 여신다는, 가을철의 추수 정신이 담겨있다.
 
 이에 대해 강증산 상제님은“세상에 시루만큼 큰 그릇이 없나니, 황하수의 물을 길어다가 부어 보아라. 아무리 부어도 시루에 물을 못 채울 것이로다. 시루는 황하수를 다 먹어도 오히려 차지 않으니 천하의 그릇 중에 제일 큰 것은 시루니라.”(증산도 도전 2:38)고 하셨다.
 
 시루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담고도 남는 가장 큰 그릇이다! ‘증산’은 온 우주 만물을 다 품어 안으신 천지의 주인인 상제님의 도와 신원(身元)을 드러내 주는 존호인 것이다.
 
 이‘증산’에 대해서 옛날부터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명나라 때 철인인 주장춘은 일찍이 선천 종교의 출현과 상제님의 강세에 대해 천지의 비밀을 꿰뚫었다. 그는『진인도통연계』에서 산의 근원인 곤륜산 제1맥에 의해 공자의 유교가 생겨나고, 곤륜산 제2맥에 의해 석가모니 불교가 생겨났음을 밝히고 이어서“곤륜산의 제3맥이 동방으로 쭉 뻗어 백두산(白頭山)에 맺히고 그 맥이 다시 남으로 뻗어 금강산을 수놓아 일만 이천 봉이 솟았느니라. 그리하여 이 기운을 타고 증산(甑山)께서 오시어 천지의 문호인 모악산(母岳山) 아래에서 결실의 추수진리[熬道]를 열어 주시나니 그 도(道)는‘모든 진리를 완성’시키는 열매가 되리라. 후에 그분의 도문에서 금강산의 정기에 응해 일만 이천 명의 도통군자(道通君子)가 출세하리라.”고 하였다.(증산도 도전 1:10)
 
 세상에서 가장 큰 그릇으로, 선천의 모든 문화를 수렴하여 완성시키는 도의 열매, 추수진리를 뜻하는 시루! 인간으로 오신 상제님께서 도호를 증산이라 하셨으므로, 사람들이 강증산 상제님, 또는 증산 상제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