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부경, 삼일신고

▣ 천부경 철학 연구(이근철 지음)

천부경81자 2012. 4. 20. 08:44

 

 

▣ 천부경 철학 연구(이근철 지음)

 

 

천부경의 ‘일’(91~95쪽)

 

일찍부터 한국민족은 생활 풍습, 건축, 미술 나아가 철학적인 사고에 이르기까지 ‘한’을 상징적으로 사용하였다. ‘일’을 우리말로 ‘하나’ 또는 ‘한’으로 쓰는 것처럼 이에 대한 존칭은 ‘하나님’ 또는 ‘한님’인 것이다. 한마디로 한민족의 사상체계는 ‘한’에서부터 발생하여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이어져왔다.

1886년에 선교사로 한국에 온 헐버트는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오기 이전에 한국인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숭배하고 있었는지에 대하여 그의 저서인 "The Passisng of Korea"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순수한 종교적인 생각은 외국으로부터 수입된 종교들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고 원시적인 자연숭배와도 거리가 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다. 이 ‘하나님’이란 단어는 ‘하늘’과 ‘님’이란 단어가 합성된 것으로 한자어로는 ‘천주’에 해당한다. 한국인들은 모두 이 하나님이 우주의 최고통치자라고 생각한다. 이 하나님에 부여된 속성과 권능은 외국인 개신교 선교사들이 기독교 신앙을 가르칠 때 사용하는 용어로 거의 일반적으로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여호와의 속성과 권능과 일치한다

 

그리고 1885년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성서번역위원회 초대위원장을 지낸 언더우드는 그의 부인이 쓴 "Undeswood of Korea"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하나님이란 말을 이해한다. 한국인들은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오기 이전부터 이미 하나님을 숭배해왔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한국인들에게 하나님이 오직 한 분뿐인 유일신이라고 가르치고, 여호와가 가진 속성들을 한국인들에게 하나님인 것처럼 말해 주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한국인들에게 포교하는 모든 일들이 아주 쉬워질 것이다. 중국과 초기 한국의 종교들에 관하여 기록된 책들을 탐구하던 언더우드는 고대 한국의 일부였던 고구려 왕국에서는 하나님이라고 불린 오직 한분의 신만을 신앙의 대상으로 숭배하였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하나님이라는 신의 이름은 설명적인 용어로써 위대하고 유일한 신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거은 한국인들이 숭배해온 신의 이름인 ‘하나님’이란 말의 사용을 한국인들이 이해하고 있었던 것에 대해 언더우드가 지금까지 발견했던 어떤 것과도 다른 것이었다.

 

이처럼 기독교를 전파하고자 한국에 입국해 있던 선교사들은 한결같이 기도교가 한국에 들어오기 오래 전부터 한국인들은 ‘하나님’을 숭배해왔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우주의 최고 통치자인 이 ‘하나님’은 그들의 야훼 여호와와 같은 속성과 권능을 가지고 있어 이를 기독교 전도에 이용하였다는 것이다.

19세기 국문학장니 주시경은 주저 국어문전음학의 서문에서 천부경의 ‘일’을 이해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한없이 넓고 높아 이래 위 안팎이 없는 저 우주에 ‘일’이 있어 사방에 가득 차 있으니 발생도 소멸도 하지 않고 처음도 끝도 없다. 이 같은 큰 하나의 안에 한없이 무수한 물체가 있어서 모든 만물이 거기에서 성장하고 마친다. 또 모든 물체가 거기에서 받는 천성이 있다. 이것이 여러 가지 만물의 원천이며 근본이다. 그래서 하늘이니 상제니 리라 함은 모두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주시경은 한글을 강의한 글의 서문에서 먼저 하나님이란 의미를 ‘일’을 설명하고 오대양 육대주 가운데의 한국에 대해 말한 후 한글의 우수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한없이 넓고 높은 우주 안에 있는 ‘일’은 시작도 끝도 없으면서 사방에 가득 차 있는 우주만물의 근원이라고 하였다. 이 ‘한’을 하늘이나 상제 또는 리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시경은 당시에 기독교청년회 선교사로 한국에 온 게일에게 “우리의 신은 크신 한분으로 ‘하나님’으로 불리는데 ‘하나’는 ‘일’을 의미하고 ‘님’은 주, 주인, 임금을 의미한다. 한 크신 창조주가 ‘하나님’이다.”라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노사 기정진 계열의 천부경을 전한 김형탁은 단군철학석의에서 우주 삼라만상의 근본적 실재를 ‘일’이라고 했다.

 

‘일’은 순환하여 그치지 않는다. 이 같은 ‘일’은 너무 커서 밖이 없고 또 너무 미세하여 안이 없고 또 처음이 없어서 앞이 없고 또 끝이 없어서 뒤가 없다. 이렇게 넓고 미세하며 멀고 가까운 일신은 빠르고 활발하여 모든 만물에 두루 흐르고 통한다

 

‘일’은 끊임없이 순환하며 너무 크고 또한 너무 미세하며 밖이 없으며 또한 안이 없고 처음이 없고 또한 끝이 없으며 앞이 없으며 또한 뒤가 없어 모든 만물에 두루 통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일’은 ‘일신’과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다.

 

그러므로 천부경에서 ‘일시무시’의 ‘일’은 무나 무시에서 시작하는 일기가 아니라 시작도 끝도 없이 항상 스스로 존재하고 영원히 존재하는 우주만물의 근본원리요 모든 존재의 근원이며 존재를 생성하고 구성하며 변화하게 하는 근본질서이다. 그러면서도 그 곳에는 한국사상의 ‘한’의 개념이 녹아 있어 신적인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다. 한마디로 ‘한’으로 표현할 수 있는 천부경의 ‘일’은 인격신적 요소를 포함하는 우주만물의 근원적 존재원리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도가에서 말하는 도의 개념과 유사하고 유가에서 말하는 리의 개념과도 유사하며 나아가 불가에서 말하는 공의 개념과도 유사할 뿐 아니라 서양의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과도 유사하면서 이 모든 개념들을 포함하는 개념으로서 고대부터 한국인의 의식 속에서 내려오고 있는 하나님이라 할 수 있다.

 

 

천부경의 ‘천․지․인’(140~145쪽)

 

천부겨의 ‘천․지․인’이 의미하는 바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려움이 있지만 체용론을 통해 전체적인 문장과 연결해서 이해해 보면 우주만물의 근원적 본체인 ‘일’에서 나눠진 우주의 가장 기본적 구성요소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천’, ‘지’, ‘인’이 단순히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하늘과 땅과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과 사람으로 상징되는 우주의 구성요소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천․지․인’은 다시 ‘천일․지일․인일’은 체와 연결해서 우주만물을 구성하는 근원으로 이해할 수 있고 ‘천이․지이․인이’는 용과 연결해서 우주만물을 구성하는 모습 또는 작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천․지․인’을 해석하면서 체용론을 활용했다고 해서 천부경의 원리가 중국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천부경을 이해하기 위해 형식적인 측면에서 중국 철학을 활용했을 뿐, 내용까지 중국 철학을 활용한 것은 아니다. 사실 체용론이 아니고도 형이상학적 개념을이해할 때 사용할 수 있는 방식은 많이 있다. 원ㄹ와 현상뿐만 아니라 원인과 결과, 과거와 현재 등 어떤 원인적 요소에 의해 나타나는 결과 등을 이해하는 개념은 많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천․지․인’을 우주 발생론적으로 볼 때, ‘천일일․지일이․인일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천’이 첫 번째로 나오고, ‘지’가 두 번째로 나왔으며, ‘인’이 세 번째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주역의 “태극은 양의를 낳고 양의는 사상을 낳고 사상은 팔괘를 낳고 팔괘에서 만물이 생긴다”는 말이나 도덕경에서 “도는 일을 낳고, 일은 이를 낳고, 이는 삼을 낳고, 삼은 만물을 낳는다”는 말과는 달리 천부경의 ‘천․지․인’은 ‘일석삼극’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모두 ‘일’에서 나뉘어 나온 것이다. 또한 ‘무진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천․지․인’의 근본은 변함이 없이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천부경이 담고 있는 우주 발생과정은 중국의 주역이나 도덕경과는 차이가 있다.

그런데 ‘일’에서 ‘천․지․인’이 나뉘어 나오는데 그 표현은 ‘천일․지일․인일’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일시무시’의 ‘일’은 우주만물의 근원적 원리로 표현되고, ‘천일․지일․인일’의 ‘일’은 근원적 원리에서 발생해 나온 일기라 할 수 있다. 이때의 ‘일기’는 환단고기의 태백일사에서는 ‘일신’으로도 표현되어 ‘천신․지신․인신’으로도 표현되었다. 이처럼 천부경은 ‘일’과 ‘일기’를 구분해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도덕경 42장의 ‘일’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일’에서 ‘이’가 나오는데, ‘이’는 주로 천지 또는 음양으로 해석한다. 그런데 천부경에서의 천지는 인과 더불어 ‘삼’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우주 구성론으로 볼 때 ‘천․지․인’은 ‘천이삼․지이삼․인이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천’의 모습 또는 작용으로 세 가지가 있고, ‘지’의 모습 또는 작용으로 세 가지가 있으며, ‘인’의 모습 또는 작용으로도 세 가지가 있다는 것이다. 즉 형상화된 모습이나 나타나는 작용으로서의 ‘천․지․인’은 각각 세 가지 구성요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는 ‘천․지․인’이 각각의 고유한 성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로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어 다양한 역할들을 함으로서 모든 만물을 생성하고 구성하며 변화를 이끌어낸다는 삼원론, 또는 삼재론의 논리를 담고 있다. 이와 같이 천부경은 ‘천․지․인’ 삼재를 통해 우주만물이 조화롭게 생성되어 변화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한국 선도 사상의 하나인 ‘천․지․인’을 고대 문헌에서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기록들은 건국신화에서 찾을 수 있다. 단군 주몽 혁거세 등의 탄생과 건국을 통해 하늘과 땅과 인간의 조화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건국의 시조이자 민족의 시조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표상함으로서 모든 한민족이 천손이라는 자부심을 담고 있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세운 나라는 힘에 의한 정복으로 시작한 나라가 아니라 ‘천․지․인’으로 상징되는 조화의 원리에 의해 세워진 신국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늘과 땅과 사람이 조화를 이루듯이 사람 사이에서도 사랑과 평화를 바탕으로 이상 세계를 이루고자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조화의 원리와 평화의 사상은 홍익인간과 재세이화의 이념으로 나타났고, 고려말 보우에 의해 ‘인즉천 천즉인’사상으로 이어졌으며, 조선 말에는 동학의 인내천 사상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한민족의 고유한 글인 한글을 창제할 때 한민족의 정신을 담고 있는 ‘천․지․인’ 사상을 응용한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한글은 표음문자이면서도 ‘천․지․인’ 사상을 담고 있어 단순한 구조 속에서 심오한 철학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한자 문화권 속에서도 한글을 일반 민중을 통해 지속적으로 사용되어 오늘날 한국을 대표하여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문화가 되었다. 이는 그 속에 담고 있는 ‘천․지․인’ 사상이 우리민족과 함께 숨쉬고 있는 우리의 사상이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천․지․인’에 관해 구체적으로 기록된 문헌은 역시 천부경이 실려 있는 환단고기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건국신화에서부터 내려온 한국의 ‘천․지․인’ 사상은 ‘천일․지일․인일’의 삼신사상으로 발전해 왔는데, 환단고기의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에는 “하늘에는 삼신이 있어 곧 하나뿐인 하나님이다. 원래 하나님은 신이 각각 셋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신이지만 작용하는 것은 세 신인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 삼신을 천일 지일 태일이라고 하였는데, 태일은 인일을 말한다.

 

이상과 같이 한국사상에서의 ‘천․지․인’은 ‘일’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인격신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천부경의 ‘일석삼극무진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일’속에는 ‘삼’을 포함하고 있고 ‘삼’은 항상 ‘일’로 귀일하고자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일’이 ‘삼극’으로 나누어져도 그 근본은 다함이 없다. 그러므로 일삼일체 삼일일체인 것이다. 그 ‘일’과 ‘삼’ 속에 모두 인격신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삼신일체의 사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천부경에서 ‘일’과 ‘천․지․인’ 속에 인격신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천부경이 중국 도가의 철학적 성격을 도덕경과는 달리 한국 선도 경전으로서 종교적 의미도 지니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천부경을 한국 선도 경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천부경의 천인합일

 

천부경에서 ‘천인합일’과 연결해서 해석할 수 있는 문장은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본심본태양앙명 인중천지일’이라 할 수 있다. ‘본심본태양앙명’이란 끊임 없는 자기 수양을 통해 마음의 근본이 태양처럼 밝아져 도를 깨우쳤다는 뜻이요, ‘인중천지일’이란 그와 같은 도를 깨우친 사람의 중심에는 천지가 하나되어 ‘천․지․인’이 합일된다는 것이다. 한국의 건국신화에서 볼 수 있는 난생설화들이 상징하는 것처럼 무지의 어둠을 깨고 태양처럼 밝은 도를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우주만물의 근원이자 주재자인 ‘일’이 ‘천․지․인’으로 나누어져 만물을 생성 변화시키듯이 수양을 통해 인간성 속에 내재한 밝은 신성이 깨어나 인간완성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천지인 합일이며 우아일체인 것이다. 이에 대해 김성환은 “태초의 우주에서 분화되는 기운과 만물의 생성, 우주적 빛을 내면 본마음에 품은 소우주인 인간 그리고 대우주와 소우주의 궁극적 합일”이라고 말한다.

‘본심본태양앙명’은 우리 민족의 ‘한’에 대한 염원이 나타나 있다. ‘한’이란 다름 아니라 태양을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때의 태양은 단순히 허공에 떠 있는 해를 의미한다기 보다는 우주만물의 근원이며 모든 만물을 비춰주는 역할을 하는 신적 존재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마음의 본성을 밝힌 사람은 태양과 같은 밝음의 경지에 오른 신적 존재에 비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중천지일’은 태백일사에서 말하는 ‘집일함삼’ ‘회삼귀일’의 정신을 함축적으로 나타내는 문장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천부경의 전반부에서 ‘일석삼극’을 통하여 ‘일’이 나위어 ‘천․지․인’의 삼극이 되는 과정을 설명함으로서 ‘일’ 속에 ‘삼’이 포함되어 있다는 ‘집일함삼’의 의미를 분명히 한 뒤, 후반부에서 ‘인중천지일’이라 하여 ‘천․지․인’의 삼극이 다시 사람 가운ㄷ서 하나가 됨을 천명함으로서 ‘삼’을 모아 ‘일’로 돌아간다는 ‘회삼귀일’의 뜻을 분명히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국 선도에서 말하는 ‘천’은 천부경의 ‘일’이나 ‘천․지․인’처럼 인격신의 요소가 내재되어 있다. 여기서 전자의 ‘천’은 선도의 최고 목표이자 우주의 근원을 말하고 후자의 ‘천․지․인’의 ‘천’은 만물의 근원적 구성 요소의 하나로서 ‘천’을 말한다. 천부경에서 말하는 ‘천인합일’의 ‘천’은 우주의 근원이 될 수도 있고, 도나 자연이 될 수도 있으며, 신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천부경의 ‘천인합일’의 진정한 의미는 자기 수양을 통해 경지에 오른 사람은 우주만물의 근원적 존재와 하나되고 우주만물을 주관하는 신과 하나되는 신인합일이라고 할 수 있다. 도교 내단학이 신선이 되거나 불로장생을 최고의 목표로 하였다면 한국 선도는 신인합일을 최고의 목표로 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선도는 천인합일에 관해 체계적인 이론으로 정리된 문헌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도교 내단학과는 달리 천을 인격화한 신의 관념으로 생각하여 여러 문헌과 생활풍습 속에서 신인합일을 추구한 흔적들을 찾을 수 있다. 또한 한국 선도는 중국의 도교 내단학과는 달리 수행을 통하여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신성을 회복하는 신인합일에 이른 후 개인적인 입신양명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사회구제를 실천하는 것을 중요시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삼국유사의 단군사회에 나오는 ‘홍익인간’의 이념은 공맹과 노장이 말하는 내성외왕과 통하고 전병훈이 강조하는 겸성과도 통하며 삼일신고에서 말하는 ‘성통공완’과 일치한다.

천부경은 ‘본심본태양앙명 인중천지일’을 통해 천인합일을 말한 후 이어서 ‘일종무종일’을 말하여 천인합일이 인간 완성의 끝이 아니라 사회 구제를 실천해 나가는 새로운 시작임을 말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일종무종일’은 우주만물의 근원적 존재원리인 ‘일’이 ‘일시무시’로 표현된 것처럼 시작 없이 시작되어 끝이 없이 끝나는 원리를 말하는 것이다. 이를 인간수양론에 적용하면 수양의 끝은 없고 공완을 통해 끊임없이 사회 구제를 실천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천부경 속에는 천인합일 또는 신입합일을 이룬 인간의 실천적 이념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그러나 신과 합일을 이룬 인간이 신의 뜻을 현실에서 실천하는 것은 한국 선도가 강조하는 기본적인 도리이다. 신이 만물의 창조주요 주재자이므로 신의 뜻에 따라 널리 모든 인간을 사랑하고 나아가 만물을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신인합일의 도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실천정신은 우리 민족의 건국신화인 단군사회의 ‘홍익인간’의 이념에 잘 나타나 있다. 신인합일을 통하여 인간완성을 이룬 자가 널리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깨달음의 실천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홍익인간을 실천하는 사람은 곧 내성외왕을 실천하는 사람이요, 겸성이요, 성통공완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