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덕일 "쓰다 소키치 - 이병도 - 그 후예들이 한국 주류 역사관 장악"
* "나라는 1945년에 해방 됐지만 주요 역사관은 아직도 조선사편수회가 주도"
예리한 역사 분석으로 우리 역사의 잘못된 기술, 감춰진 진실을 파헤치는 작업을 해 오고 있는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이 19일 언론인터뷰를 통해
한국사의 주요 역사관이 쓰다소키치(津田左右吉)- 이병도 -그의 제자들에 의해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다고 정면으로 문제제기하면서 역사학계에 상당한 파장이 예상된다.
이덕일 소장은 최근 이 같은 문제의식을 담은
신간<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이란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이날 <평화방송> 라디오 시사프로에 출연한 이덕일 소장은
우리 역사관에서 크게 잘못된 네 가지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 소장은
첫째로 한사군(漢四郡)의 위치와 관련해 중국 고대서에서 조차도
한사군의 위치를 요동(遼東)으로 엄연히 기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식민사학을 거치면서 한반도내 지역으로 둔갑됐다는 점을 강하게 문제제기했다.
"일제식민사학자들이 한사군은 한반도에 있었다고 주장한 게 백년이 채 안된다.
한사군(漢四郡)은 실제로는 2천 년, 2천 백 년 전에 설치된 것이다.
그러면 어느 주장이 맞는가를 살펴보기 위해선 한사군이 설치되었을 때 기록들을 보면 된다.
중국의 고대 기록들 '사기'나 '한서'라든지 '후한서' '삼국지' 같은 중국의 고대기록들은
한사군에 관해서는 전부 다 요동(遼東)에 있다고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식민사학자들은 한반도 황해도나 평안도가 요동이었다고
계속 우격다짐으로 고대 기록을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주장한 것이다.
최영 장군이 요동수복하기 위해서 출진하는데
이 식민사학자들 말대로라면 황해도가 요동인데 요동수복할 것이 무엇이 있다고 군사를 파견하겠는가?
그러니까 이것은 처음부터 우리 고대사를 식민지로 시작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로 만든 것인데
이것을 해방이후 해체하지 않고 아직까지 정설로 만들어서
결국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지 않았다고 주장하면 이단이다 재야다
이런 식으로 공격해서 학계에서 내모는 식으로 배타적으로 독점적으로 학문권력을 유지해왔는데
이제는 그런 틀을 깰 때가 되지 않았는가."
한사군의 한반도내 존재이론이 우리 역사학계에서 아직도 그 틀이 깨지지 않는 이유에 대해
이 소장은
" 한반도 고대사를 북부는 중국의 식민지로 한반도 남부는 임나일본부라고 하는
일본 식민지로 기술함으로써 한국의 고대사를 축소 왜곡시키고
나아가 일제의 한국 식민통치의 역사적 정당성을 노린 정치적 음모가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학교에서 한사군에 대해 시험도 많이 나온다.
두 가지로 나오는데 다음 중 한사군이 아닌 것은?
또 한 가지 문제 유형은 다음 중 한사군의 중심지인 낙랑군의 위치는?
그러면 평양이라고 써야 정답이 된다.
한사군은 무엇인가?
한사군은 우리 민족 최초 국가인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거기에 설치했다는 중국 한나라의 고대 행정구역이다.
말하자면 고대판 조선총독부다.
우리가 학교에서 역사교육 시킬 때 자랑스런 것도 무수히 많을 텐데
왜 하필이면 한사군에 관한, 우리 역사는 식민지로 시작됐다고 얘기하는 것을 학생들에게 달달 외우게 했는가?
결국 이것은 나라는 1945년에 해방됐는지 몰라도
결국 역사관은 전혀 해방이 안 된 채 일본사람들이 가르쳐왔던 그대로 가르쳤던 것이고 배워왔던 것이다."
이날 이덕일 소장은
우리 주류 역사관에서 크게 잘못된 두번째 문제점으로서
역사학계가 정설처럼 기술하고 있는
김부식의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은 일제사학자들의 정치적 목적과
그들의 후예들의 담합이 낳은 대표적 역사 조작사례임을 강도높게 지적했다.
"고려와 조선이란 나라가 다 문장의 나라고 문사의 나라다 .
그 누구도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조작됐다고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러다가 일제시대 와 가지고 일제 식민사학의 핵임인물이자 이병도씨 스승이기도 한
쓰다소키치(津田左右吉)가 최초로 만든 이론이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이다.
왜 이런 불신론을 만들었는가 하면,
쓰다소키치(津田左右吉)의 한국 고대사관은 한반도 북부에는 한사군이란 고대 중국의 식민지가 있었고
한반도 남부에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란 고대 일본의 식민지가 있었다는 것인데
일본 고대사료인 고사기 일본서기같은 일본 역사서에는 임나일본부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삼국사기에는 임나일본부가 전혀 안 나올뿐더러
삼국사기에 기록을 따르면 신라나 백제나 이런 국가들이 상당히 강력한 국가다.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의 고민이 뭐냐면
임나일본부가 김해를 중심으로 한반도 남부를 일본이 점령하고
임나일본부란 고대판 총독부를 세웠다라는 주장인데
현해탄 뱃길이 상당히 험해서 가을부터 봄까지는 배가 못 다닌다.
그렇게 되면 이 식민통치기구는
가을부터 봄까지는 본국의 지원없이 혼자 버텨야 한다는 얘긴데
지금 만일 아프간에 가 있는 세계최강 미군이 가을부터 봄까지 본국의 지원이 끊어진다면
어떻게 버틸지 지금도 상당이 어려울텐데 당시에 가능했겠는가?
그래서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는 임나일본부를 살리려면
삼국사기 초기기록에 나와있는 백제나 신라같이 강력한 고대국가는 존재해선 안 된다.
그래서 김부식의 초기기록이 다 가짜다 라고 이렇게 주장한 것이다."
이덕일 소장은 김부식 삼국사기 초기 기록이 진실임은 최근까지 발견되고 있는
여러가지 구체적인 유물자료로 분명히 뒷받침되고 있다는 점도 아울러 강조했다.
"예를 들 것이 무수히 많다 .
1970년대 공주에서 무녕왕릉이 발견됐다.
그것이 무령왕릉이란 것을 알게된 게 거기에 지석이 나왔는데
지석에 왕의 이름은 사마(斯麻)다 해서 사마가 삼국사기에 무녕왕의 이름으로 나오니까
무령왕이란게 알게됐고 또 사망한 연대도 562년 5월이라고 지석에 나와 있는데
삼국사기에도 똑같이 562년 5월이라고 달까지 정확하게 나와 있다.
그러니까 예를들어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이야기같이 신라를 예로 들면 5세기 중반까지는 다 가짜고
5세기 이후부터 믿을 수 있다는 얘기인데
김부식이 역사서를 쓸때 5세기 이후부터는 진짜로 쓰고
그 전에 수십명 왕에 관한 기록은 전부 다 가짜로 임금 이름 만들고
그것을 전부 다 가짜로 만든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이거다."
이 소장은
"이런 말도 안되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아직도 주류사학계는 정설로 삼으면서
심지어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인용해서 논문을 제출하면 통과되기가
대단히 어려운 이런 일까지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
대한민국은 1945년에 해방이 됐지만
이런 몇몇 주요 이론의 역사관에 대해선 아직까지도 조선사편수회가 주도하고 있다라고 봐도
전혀 과언이 아니다"라며 개탄했다 .
이 소장은 우리 주류 역사학계 역사관의 세번째 문제점으로
일제 식민시대 우리 선조들의 항일무장투쟁사에 대한 고의적인 축소 왜곡사례를 들었다.
그는
"국사교과서에 항일투쟁사를 기록하는 원칙은 , 원래 식민지였다가 해방된 국가는
무장투쟁을 위주로 서술해야 하고 그 다음에 애국계몽운동을 서술해야 하는데
우리 교과서는 그것이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너무나 유명해서 감출 수 없는
몇 몇 사건들만 기술하고 반면에 일제시대 식민지 백성의 생활상을 왜곡 과장해 기술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우리 교과서는 무장투쟁은 뭐만 써주냐 하면
너무 유명해서 감출 수 없는 청산리 대첩이나 봉오동 대첩 ,
윤봉길 의사, 안중길 의사 이렇게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은 써주고 그 외에 것은 일체 써주지 않는다.
사실상 만주지역에는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라고 하는 '참정신'이라고 불리는 삼부가 있었다 .
이곳은 다 무장독립 부대를 갖고 있었다.
각자 많을 때는 수천 명 적을 때는 수백 명 아주 침체기엔 수십 명 정도의 무장독립군을 갖고 있었던 세력인데
이번에 새로 개정된 국사 교과서를 보면 그냥 삼부가 있었다 라고만 써 있고
이들이 무엇을 했는가는 일체 서술을 하지 않았다.
반면에 일제시대 때 국내생활에 대해서는 뭐라고 기술했냐하면
1930년대에 주택에 대해서 집에 응접실이 있고 아이들 놀이방이 있고
그래서 대단히 식민지 백성이 잘 사는 것처럼 써놓고
1940년대에는 영단 주택이라는 일종의 서민연립주택을 조선총독부에서 지어주었다고
이런 식으로 국사 교과서에서 써주고 있다."
그는 일제시대 항일무장투쟁사례 가운데 국내 주류 역사학계에서 무시되거나
교과서에 실리지 않고 있는 몇 몇 중요한 무장항일 투쟁 사례를 소개했다.
"무수히 많은데 한 두 가지 말씀을 드리면 예를들어 일본 사이토 총독이 압록강을 순시한 적이 있다.
압록강까지도 독립군을 다 평정했다는 식의 이야기인데 사이토 총독이
배 두 대를 타고 압록강을 내려오는데 참의부 독립군이 압록강 대안에 매복하고 있다가
사이토가 탄 배에 집중적으로 저격을 가하니까 사이토 총독이 황급히 도망가는 사건 있었다.
이것이 나중에 일본 국회에서까지 이 사이토가 불려가서까지 혼줄이 나는데
이런 사건도 일반 국민들이 모른다고 해서 전혀 서술을 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1920년대에는 참의부에서 상해에서 무기 구입해서 당시 참의장했던 김성학 선생이란 분이
무기를 구입해서 나눠주니까 일제기록에도 이것이 국내 진격작전
그러니까
압록강을 건너서 국내 평안도 황해도 까지 와서 일본 파출소라든지 이런 것을 습격하고 돌아간 사건이 97회 이상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교과서에는 일체 한 줄도 나오지 않고 있다."
이 소장이 세번째로 지적한 역사관의 문제점은 식민사관과 함께 노론사관이 우리 역사학계에
아직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식민사관은 바로 노론사관과도 맥이 닿아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조선후기 노론이 남인 물리치고 소론 물리치면서 성리학 윤리사상 체제를 만들고
노론일당독재를 만든다 .문제는 이들 노론이 나라망할 때 대거 친일에 가담한다 .
내가 분석해보니까 우리나라 대한제국을 멸망시키고 나서
일본이 76명에 달하는 조선인들에게 작위를 주고 돈을 주는데
그 76명중에 당파를 분석할 수 있는 사람이 64명 정도 된다.
제가 죽 당파 조사를 해보니 그 중에 6명이 북안이고 두 명 정도가 소론이고 나머지 56명이 다 노론이다.
그리고 노론 세력들의 또 일부가 조선사편수회에 들어가서 우리 역사를 왜곡하는데 앞장선다 .
이 세력이 해방이후에도 사회주의 사학자들이 월북하고 위당 정인보 선생은 6.25때 납북되고
그러면서 이들이 역사학계를 주도하면서 한쪽은 노론사관,
한쪽은 일제식민사관적인 기술을 해서 아직도 한국사에 주류 역사인식구조가 이 두 가지 틀위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이날 이 소장은 인터뷰 마무리에서
"우리는 중국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역사침략에 하나하나 즉자적 대응을 할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틀을 바로 잡아야 할 때다 .
일제식민사관을 해체하고 (일제사관의 모태인)노론 당파사관을 해체하고
한국사 전반을 재구성해보면 중국의 동북공정은 설 자리가 없어지고
일본의 역사침략도 설 자리가 없어진다.
중국 동북공정의 주요 이론중 하나가 한반도내 한사군 설에 기대서
한반도 북부는 중국의 역사영토였다고 주장하는 데 그 뿌리가 전부 일제 식민사학에 있다.
그래서 이런 전반을 해체하고 한국사를 바로세우면 일제역사침략이나 중국 동북공정이나
다 설자리가 없어지는 것을 그 사람들도 다 알고 있다.
문제는 바로 우리에게 있다고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출처 : 이덕일 "쓰다 소키치 - 이병도 - 그 후예들이 한국 주류 역사관 장악" - 오마이뉴스
* 朝鮮國 上計神 中計神 下計神이 無依無托하니
조선국 상계신 중계신 하계신 무의무탁
不可不 文字戒於人이니라
불가불문자계어인
조선국 상계신(환인) 중계신(환웅) 하계신(단군)이
몸 붙여 의탁할 곳이 없나니
환부역조하지 말고 잘 받들 것을
글로써 너희들에게 경계하지 않을 수 없노라. (증산도 도전 道典 5:347:16)
------------------------------
* 347:16 이 때의 삼신은 인격신임을 알 수 있다. 모든 인격신은 인간으로 다녀간 실존 역사의 인물이다. 상제님께서 한민족사의 뿌리문화 시대를 개창하신 환인과 환웅과 단군의 역사 시대를 실존사로 인정해 주신 것이다. (증산도 도전 측주 5:347:16)
'한민족 9천년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증산도의 민족관 - 환단고기의 3번째 북부여기에 관하여 (0) | 2012.02.23 |
---|---|
[증산도와 환단고기] 한민족 역사의 비밀, 만국활계남조선 (0) | 2012.02.08 |
[개천절의 의미]10월 3일 개천절은 환웅천황이 배달국을 건국한 날 (0) | 2011.10.02 |
한민족 뿌리 역사의 근거 - 홍산문화 (0) | 2011.09.12 |
[아스텍문명]아스텍Aztec 문명을 건설한 주체는 한민족 (0) | 2011.09.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