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산도 도전 통독

[증산도 도전공부 필독서] 일본고대문화사신론(홍윤기 지음) 자료정리(1),증산도

천부경81자 2011. 11. 7.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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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문화사신론』을 읽고서 상제님께서 “조선은 원래 일본을 지도하던 선생국”(증산도 道典 5:118)이라는 말씀이 너무도 선명하게 인식되었습니다. 조선은 고대 일본에 정신문화, 물질문화를 전수해준 스승과 같은 나라였습니다. 고대 일본은 신라 백제 고구려에서 건너간 한국인에 의해 문화가 꽃피고 발전했습니다.


과거 역사를 살펴보면 일본은 스승의 나라 조선의 역사를 왜곡말살하고 때로는 침략까지 하는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이에 대해 상제님께서는 “일본은 너무 강렬한 지기(地氣)가 모여 있어 그 민족성이 사납고 탐욕이 많으며 침략열이 강한지라. 조선이 예로부터 그들의 침노(侵擄)를 받아 편한 날이 적었다”(증산도 道典 5:295)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일본의 땅기운이 너무 강해서 민족성이 침략열이 다른 민족보다 강했다는 말씀입니다.


뿌린대로 거둔다는 말이 당연하다면, 일본의 불의한 행동은 천지에서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배은망덕(背恩忘德)은 신도(神道)에서 허락하지 않는다” (증산도 道典 5:118)고 상제님께서는 엄중히 경계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개벽의 시간대가 되면 일본은 바닷속으로 침몰하는 참극을 겪습니다. “일본은 불로 치리니 종자도 못 찾는다.”는 상제님 말씀처럼 지진과 함께 물속으로 가라앉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질학적 요인도 같이 작용하여 일어나는 엄청난 파국입니다.


상제님께서는 “일본은 내 일을 해 주는 일꾼이나 물러갈 때는 떨어진 신발만 양손에 들고 돌아가게 되리라.” (증산도 道典 5:120)는 말씀처럼 36년간 한국을 식민지화하고 침탈을 강행하던 일본을 한국에서 물러가도록 역사를 바꿔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강한 땅기운을 조절하기 위해 “지기를 뽑아 버려야 조선도 장차 편할 것이요 저희들도 또한 뒷날 안전을 누리리라.” (증산도 道典 5:295)는 말씀처럼 일본의 강한 땅기운을 제어해서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도 안정을 누리도록 공사를 집행하셨습니다. 그것이 상제님께서 집행하신 천지공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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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6 - 신도는 제천의 고속


저자의 눈을 다시 한번 번쩍 뜨게 해준 것은 도쿄대학 사학과 구메 구니다케 교수의 역사 연구론이 실린 사학회잡지였다. 이 역사 연구 학술지에는 구메 구니다케 교수의 [신도는 제천의 고속]이라는 제하의 역사론이 3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구메 구니다케 교수는 이 논문을 통하여 일본 근대의 역사학자로서 학문적 양심을 굽힘없이 사실대로 써냈다. 일본 왕실의 중심신앙은 하늘의 천신들을 받드는 신도이다. 그와 같은 하늘의 천신들을 그들의 조상신으로 떠받들게 된 일본신도의 본래 일본의 것이 아니고 상고시대 고조선에서 단군을 신앙하던 고조선의 조선신들에 대한 천신 제사양식이 고대 일본으로 건너왔다는 사실을 고문헌들을 제사하며 구체적으로 논증했다.

한민족에게는 상고시대로부터 천신, 일월신 등을 모시는 신앙체계 위에서 주몽의 모신인 부여신이며 동명신, 구태신, 혁거세신 등 천신과 국조를 신앙하는 국가신 제사 체계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져 왔던 것이다. 바로 그러한 한민족 고래의 천신과 국조신 신앙체계를 답습한 것이 고대 일본 왕실의 신앙이 되었음을 구메 구니다케 교수가 명약관화하게 밝혔다.

구메 구니다케 교수는 이를테면, “일본의 신도는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예의 무천 등등, 고조선 당시의 천신 제사인 제천의식을 바탕으로 일본왕실에게 이루어졌다”고 진솔하게 시인하며 그 사실을 19세기 말의 일본 사회에다 철저하게 공헌했다. 그뿐 아니라, 고조선에서 임금이 하늘의 신에게 제사드리는 국가의 제천대전은 곧 일본왕실에서 천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신상제라는 국가의 큰 제사를 거행하는 일로 옮겨왔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일본 천황가 사당인 이세신궁에서 천황이 직접 찾아와서 천신에게 제사드리고 있는 “이세신궁의 신상제 제사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에게 제사 지내는 것이 아니고 천신을 제사지내는 것이다”라고 단정했다. 즉 일본왕실에서도 고조선의 한신 등 조선신들을 제사 모셔오고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놀라운 내용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구메 구니다케 교수의 연구론 [신도는 제천의 고속]은 지금까지 일본 천황가의 소위 ‘황국신도’를 뿌리째 뒤엎어버린 엄청난 학술적 고증이었다. 


P8 - 이세신궁의 유래


이세신궁이 본래는 신라 천일창 왕자가 한민족이 상고시대부터 조상신으로 섬겨온 곰신의 신주를 모셔다가 세운 터전이었다. 일본 역사책에도 “천일창 왕자가 신라로부터 곰신단을 일본땅으로 모셔왔다”고 밝혀져 있다. 더구나 신도가들이 자랑스럽게 내세운 이세신궁의 신궁이라는 사당 호칭조차 일본에서 최초로 발상된 것은 아니다. 일찍이 신라에서는 “소지왕 9년, 박혁거세 탄생지인 나을에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를 제사모시는 사당으로서 처음 신궁을 세웠다”. 이세신궁의 신궁 명칭은 신라에서 호칭하던 당시의 사당명칭을 답습했던 것이다.


P20 - 일본 개국신화는 조선 개국신화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


당시 일본의 대표적 민족학자였던 도쿄도립대학의 오카 마사오 교수의 다음과 같은 연구발표는 일본인들에게 충격과 동시에 큰 주목을 끌게 되었다.

“조선의 단군신화를 보면 천신인 환인이 아들 환웅에게 ‘3종의 보기’를 주어 신단수 아래로 내려가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우게 한 조선신화를 본뜬 것이, 일본신화의 ‘3종의 신기’였다. 일본신화는 단군신화와 가야신화를 모태로 삼아 발생했다”라는 단정이었다. 그 뒤를 이어 일본에서는 민족학자뿐 아니라 역사학자며 신화학자들도 줄지어 일본 개국신화가 단군 개국신화, 가야 김수로왕 개국신화, 주몽의 고구려 개국신화를 모작했음을 밝히게 되었다.


P27 - 히모로기는 신라 이두식의 한자어


김석형 교수는 일본 역사에서 말하는 신주를 모신 대나무제 신단인 “히로로기는 실로 ‘신궁’ ‘신사’를 의미하며, 요컨대 ‘무’의 ‘사당’이다. 후세에 이르러 조선에서는 천시되었으나 일본에서는 계속하여 국가적인 보호를 받아왔다. 신라에 신궁이 있었다는 것은 [삼국사기]에 명문이 있다. 이 당시 신라에서도 무의 사당은 종묘로서 국가적인 숭배의 대상이었다. 일본의 신궁 신사의 뿌리가 샤머니즘에서 유래한다는 것은 상식이며 그것은 어디서나 공통이다”라고 지적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일찍이 18세기 일본 역사 고증학자 도 데이칸의매우 중대한 주장이다. 그는 히모로기를 가리켜 “무릇 히로모기라는 말은 신라어니니라”라고 했다. 여기서 히모로기는 당시의 신라 이두식의 한자어 표기를 그대로 쓴 것이다. 물로 뒷날에 와서 히모로기라는 한자어 표기가 새로 등장했다. 즉 신라의 ‘무’의 ‘사당’이 일본에 건너가서 일본 왕실의 신궁이 되었음을 도 데이칸도 아울러 입증하여 주고 있는 셈이다.


P28 - 한반도로부터 일본으로 건너간 기마민족의 발자취


일본 정복자였던 오진 천황의왕릉의 배총으로 알려진 마루야마 고분에서는 한국에서 건너온 마구들이 출토된 바 있다. 오진천황의 지배의 터전이던 가와치땅의 오진천황릉 터에서 인동초 문양으로 정교하고 아름답게 투조해서 만든 금동제로 조각된 아름다운 말안장 장식인 안교가 나왔다. 곧 그것은 기마민족의 왕성했던 말문화의 발자취가 현해탄을 건너가서 일본을 정복했다는 것을 고고학적으로 고증하는 한 실례이다.


P30 - 한반도 정복자들의 기마민족국가 학설


이노우에 미쓰사타 교수는 에가미 교수의 기마민족학설, 즉 조선의 기마민족이 조선땅으로부터 규슈 땅에 건너와서 일본의 천황이 되었고, 계속해서 규슈에서 일본 본토인 아니와쓰로 들어가서 나니와쓰와 야마토 지역에서 천황이 되었으며, 한반도에서 계속해서 일본으로 조선인들을 불러들여서 강력한 정복왕조 국가를 만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노우에 교수는 “에가미 교수의 기마민족의 일본 정복이 BC 2C 경이라면 타당하다. 그러나 에가미 씨의 한국기마민족의 규슈 침략이 4C라면 시기적으로 걸맞지 않는다”고 했다.

이상과 같은 것은 어디까지나 고대의 무덤속에서 캐낸 유물들을 가지고 고고학적인 견지에서 역사의 내용을 규명한 것이다. 즉 고분시대의 매장 유물들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역사와 문화의 발자취를 밝혀주게 되는 것이다. 에가미 나이오 학설의 정복의 시기 4C 등 역사 콘텐츠에 대하여 와세다대학 사학과 미즈노 유 교수의 주장은 왜나라 역사에 등장하는 외국으로부터 침입하여 온 기마민족으로서의 일본 정복왕조는 가야계의 스진왕조가 아닌 백제계 닌토쿠왕조라고 주장했다.


P40 - 천황가의 황조신은 본래 천조대신이 아닌 고황산령존


우에다 마사아키 교수는 “고황산령존이야말로 천조대신보다 원초가 되는 신이었다”고 단정했으며, 이 저서에서 “고황산령존의 신앙은 일본의 농경문화가 도입되어 전개되던 과정에서 육성된 것이었다”고 밝혔다. 즉 이는 조선으로부터 건너온 벼농사와 더불어 농업신으로서의 드높은 신분의 위상을 시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우에다 마사아키 교수는 “일본 고대사 [고사기]에서는 고황산령존을 고어산소일신으로도 부른다. 또한 다른 이름으로는 드높은 나무의 신인 ‘고목신’으로도 부른다“고도 지적했다. 우에다 마사아키 교수가 지적한 ”고목신이란 도대체 무슨 신인가. 그것은 신에 의하여 신체목이라는 신격화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고황산령존이 천손강림하던 당시에 ‘하늘의 히모로기를 가지고 중원땅에 내려와서 나의 손자를 위하여 제사를 모셔라’고 명령했다는 것이 [일본서기] 제2의 1서에 보이고 있고, [고어습유]에도 고황산령존을제사모시느라 히모로기를 세웠다“고 했다.

다시 쉽게 설명하자면 우리 고조선에서 큰 나무로 신이 깃들이는 솟대를 세우고 제사모신 유습이 고대 일본으로 전해진 조선 고대 신도 제사의 히모로기 천신 제사 종교 제례이다. 신체목은 조선시대 ‘강릉 단오굿’으로도 오늘에까지 강릉땅에서 전해져 오며, 그런 대규모의 신체목 제례의식의 유습은 일본 교토의 ‘기온마쓰리’에서도 동일하다.

특히 조선 삼국시대부터 한민족은 신성한 지역인 소도에다 영고를 단 큰 나무를 세우고 천신 제사를 지내왔다. 일본 왕실 신상제 제사에 바로 그 모습이 오늘에도 고스란히 전해 오고 있다. 즉 삐주기 나뭇가지에 방울을 매달고 고수를 북을 치며 천황과 더불어 신상제 제사를 지낸다.


P55 - 조선 청동제품의 일본 유입

도쿄대학 사학과 이노우에 미쓰사타 교수도 그와 같은 발자취에 대하여 일본의 옹관묘에서 출토된 다수의 청동기 제품은 일본인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주로 조선으로부터 유입된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 청동제품에서 왕실의 상징인 ‘삼종의 신기’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밝혔다. 또한 이노우에 미쓰사타 교수는 청동 제품들인 동검, 동모, 청동거울과 옥류 등은 “야요이시대 족장의 분묘에서 볼 수 있는 ‘3개의 보기’와 관계가 있는 것이리라. 왜냐하면 이런 풍습은 4세기 초엽에 시작되는 고분시대에 들어와서도 처음의 1세기 정도 전해졌고 더구나 이 고분시대 초엽에 국가 수장으로서의 천황가의 지위가 확립되었다고 여겨진다”고 했다.

이와 같은 이노우에 미쓰사타 교수의 주장은 천황가가 야요이시대에 청동기 문화를 한반도로부터 일본으로 가져온 도래인들에 의하여 형성된 것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이노우에 미쓰사타 교수는 에가미 나미오 교수의 [기마민족국가]설을 바탕으로 다음처럼 논술했다.

“기기의 오진 대목과 그 밖의 기사에서 하타씨의 조상인 유즈키노키미는 120현의 인부들과 야마토노아야씨의 조상 아치노오미가 당류 17현을 거느리고 건너와 일본에 귀화한 것을 기사로 쓰고 있다. 그 이후에도 얼마나 많은 귀화인이 일본에 와서 토착했는지는 기나이 지방 사람들의 씨성을 쓴 [신찬성씨록]의 제번 사람들을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만약 당시의 일본의 지배자가 한반도와 대륙 지역으로부터의 귀화인들과 전혀 혈통상 관계가 없었다고 했다면 그처럼 수많은 귀화인이 오진시대부터 계속하여 건넌왔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P61 - 한국인과 일본열도 왜인들의 혼혈 발자취


한국인과 일본열도의 왜인들이 서로 혼혈된 발자취는 일본 고대의 학자들도 그 사실을 문헌에서 시인하고 있다. 가장 최초의 문헌으로서의 옛 기록은 일본의 왕조사인 [신항정통기]에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다.

“옛날에 일본은 ‘삼한과 똑같은 종족이노라’고 하는 기록이 있었으며, 그 책을 간무천황의 어대에 불질러 버렸노라”고 했다.

과연 이것이 무슨 주장인가. 그와 같은 왜국 왕실의 한국 연관 서적들의 분서 사건은 한일 동족간의 중대한 역사의 내용을 암시하고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일본천황가는 한반도에서 일본에 건너간 한국인 정복왕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왕가였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내용은 일본 왕실 고문서 [연희식]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이를테면 한반도 도래인들을 일본으로 건너온 황족으로 간주하여 온 와세다 대학 사학과 미즈노 유 교수가 “남조선의 한민족, 특히 그 동부의 신라계 민족은 일본 시마네현일대로 바다를 건너온 이즈모족으로서 A형 혈액형률이 지극히 높은 인종에 속하며 서로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이루어진 양자간의 교류를 진실로 자연스러운 상태를 보여준다”고 밝혀 큰 주목을 끌었다. 또한 그는 경상도지방 사람들의 A형 혈액형률과 이즈모지방 사람들의 A형 혈액형률이 거의 똑같다는 분포표까지 비교 제시한 것은 너무도 유명한 연구발표였다.

도쿄대학 이학부 인류학교실 하니와라 가즈로 교수는 조몬시대 1천년 동안의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도래인 집단의 숫자를 고대 묘지에서 발굴한 두개골 등을 분류 조사한 모델을 수식화시켜 시뮬레이션으로 통계치를 계산했다고 한다. 그 결과 일본에 먼저 건너와서 살던 선주민 1명에 비해서 한반도 도래인은 8명이 넘게 나왔다고 하는 연구 통계를 냈다.


P63 - 조몬토기는 빗살무늬토기의 영향을 받은 것


신석기 시대 일본열도에서는 새끼줄 무늬의 두꺼운 토기가 등장했다. 새끼줄로 무늬를 찍었다는데서 이른바 ‘조몬토기’라고 그릇이름을 부르게 된 것이다. 이런한 조몬 토기를 만들어서 사용하게 된 시기를 가리켜 ‘조몬시대’라고 부른다. 그런데 새끼줄 무늬의 조몬토기는 한반도의 빗살무늬토기 등에 의한 영향이 매우 컸다. 이를테면 부산 동삼동 패총에서 발견된 빗살무늬토기가 일본 쓰시마 유적에서 다량으로 출토되었고, 일본 큐슈 각 유적에서도 한국 빗살무늬토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소바타’토기가 출토된 바 있다. 또한 니카타의 동굴에서는 빗살무늬토기가 발견된 바 있다. 이 “빗살무늬토기가 한반도로부터 널리 유라시아에 분포하는 빗살무늬토기와 똑같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고 쓰보이 기요타리 교수는 역설하고 있다.


P65 - 벼농사와 철기, 청동기 및 노예제도의 전래


고대 일본의 벼농사는 한반도로부터 건너가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입증하고도 남는다. 일본에서는 BC 3세기 경부터 주로 한국 남부로부터 규슈 북부로 건너온 한국인들에 의해서 벼농사와 금속기의 기술이 전해져서 새로운 문화가 일어났다.

그런데 학자에 따라서는 일찍이 BC 1세기 경부터 한국에서 규슈 북부로 벼농사며 철기문화가 들어왔다고 한다. “논농사는 후술하는 것처럼 BC 1세기 전후에 한국에서 건너왔다. 기와집 건축도 아스카 시대에 한국에서 불교와 함께 전해 온 것이다. 고유 일본인은 석기며 토기를 사용해서 채집과 수렵 어럽 등을 행했고, 어느 정도의 재배도 했는데 그 사회 조직은 계급이 없는 공산사회였다. BC 1세기경이 되자 한국이며 중국으로부터의 새로운 인종과 문명이 들어왔다. 즉 한국인이 벼농사며 철기, 청동기 및 노예 제도의 사회 조직을 가지고 우선 북규슈에 들어왔다.

그 결과 일본에서 논에 의한 벼농사가 퍼지게 되고, 종래의 공산사회는 노예와 그 소유자, 대토지 소유자와 경작농민이라고 하는 계급사회로 바뀌었고 그와 같은 과정은 전쟁이거나 타협에 의해 진행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노예 소유자며 대토지 소유자가 농민이며 노예를 지배하는 국가가 출현했다. 이것이 철기와 석기 즉 금석병용시대이다. 그와 동시에 외래인이 장기간 동안에 고유 일본인과 혼혈했으므로 북규규에서는 고유일본인과 그 다음의 고분시대의 특징을 가진 금석병용시대의 사람 뼈가 무덤에서 발견되고 있다. 이 금석병용시대인보다도 한국인이나 중국인에 가까운 고분인이 출현하고 그 자손이 현대 일본인이 된 것이다.


P73 - 야요이 문화는 한반도에서 전해진 것


일본의 야요이문화는 한반로부터 전해진 논농사와 금속그릇과 문양을 갖는 적갈색의 야요이토기를 사용한 시대의 문화를 말한다. 이 야요이시대는 BC 3세기 경부터 AD 3세기 경까지 약 6백년간을 일컫는다. 좀더 자세하게 사펴보자. 일본에서는 BC 3세기 경에 주로 한국 남부로부터 규슈 북부에 건너간 도래인들에 의해서 벼농사와 금속그릇의 기술이 전해져서 새로운 문화가 발생했다.

벼의 논농사를 지으면서 청동기며 철기와 또한 야요이식 토기를 사용하는 것을 특색으로 하는 문화를 가리켜 야요이문화라고 부른다. 그런 까닭에 북규슈 등 서일본에서는 한국 도래인들이 정착하게 되었고 선주민들과 혼혈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와 같은 사실은 서일본에서 발견된 야요이 전기의 인골에서 분명하게 밝혀지고 있다. 서일본의 야요이 전기의 인골에는 키가 작은 조몬인과 평균신장 163센티의 키가 큰 남성 인골이 있다. 한국남부로부터 건넌간 도래인의 피를 받아서 비로소 키가 커진 야요이인이 생겼다고 본다. 그러므로 키가 작고 왜소한 선주민들인 조몬인들이 살고 있던 곳으로 벼농사와 철기문화를 가지 키가 큰 한국인들이 건너가서 선진국 문화로서의 새로운 야요이문화를 일으키게 되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미리 밝혀두자면, ‘야요이문화’라는 것은 분명히 한국으로부터 들어온 것이다.


P77 - 한국쟁기 등의 농기구와 한국대장간


고조선으로부터 벼농사가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것은 볍씨 자루만을 덜렁 어깨에다 둘러매고 가는 것이다 아니다. 큰 배에 농기구와 배틀 등 각종 생활도구, 또한 삽과 칼, 괭이를 직접 만들기 위한 대장간 시설 등도 모두 함께 실어갔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우리나라에서 키우던 가축으로서 소와 닭과 돼지 등 동물도 일본으로 함께 데리고 갔다고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은 발자취를 우리는 앞으로 더욱 구체적으로 규명해야만 한다고 본다. 또한 가축의 일본으로 건너간 도래과정도 한일농업 교류사상 중요한 연구과제다.


P86 - 단군 곰신 신주 모신 곰신단의 일본 도래


일본 고대역사책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보면 신라로부터 일본에 건너간 천일창 왕자가 최초로 일본에 ‘곰신단’을 가져옴으로써 일본왕실에는 비로소 일본의 신도가 개창되고 역사상 처음으로 일본에 신궁이 섰다고 한다. 일본 왕실 편찬으로 주장하고 있는 고대 역사책에서 일본 제11대 스이닌 천황 3년 3월에 “신라 왕자 천일창이 왜나라에 건너왔다”고 했다.

이 당시 천일창 왕자는 신라에서 ‘곰신단’과 옥이며 양날창과 청동거울 등 일곱가지 물건을 가지고 왔다. 옥이며 양날창과 청동거울이 천황가 삼신기의 실체라는 오카 마사오 교수의 주장에 앞서 일찍이 도시샤대학 사학과 미시나 하키히데 교수가 “곰신단은 고조선의 ‘태양신’을 모셔다 제사지내는 하늘의 제사 종교의식”이라는 연구논문도 주목을 받았다. 즉 단군신앙이 천일창왕자에 의하여 일본왕실로 전래된 것을 다음처럼 시사했다.

좀더 구체적으로 천적종의를 풀어보면 그것은 상고시대 조선민족이 곰신을 받들며 신단에다 단군을 모시는 천신제사의식이었다고 본다. 이 제사의식에서는 제단에 제물과 함께 칼이며 동착 등을 진설했다고 보련다. 천신제사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하늘의 신을 해의 신, 즉 태양신으로 상징해 온 것을 의미하다고 보련다.

그런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신라왕자 천일창을 [삼국유사]에 나오는 연오랑으로 추찰하는 주장도 나온 것이다. 도쿄대학 사학과 사카노토 타로 교수 등이 “천일창 전설이 [오진기]에는 신라국 왕자 아메노히보코로, [고고슈이]에서는 우미노히보고로 보이는데, [삼국유사] 권1에서는 신라 동해 바닷가에 살던 연오랑이 일본에 건너와서 왕이 되었으며 그의 아내 세오녀도 뒤따라 건너와서 귀비가 뒤었다”는 역사 설화를 지적한 것은 조선 상고시대의 단군 천신제사 의식이 신라국 왕자 천일창에 의해서 일본으로 건너간 발자취를 규명하는 역사 연구와의 중요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본다. 연오랑은 신라 아달아왕 4년인 서기 157년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P134 - 한반도에서 건너간 매장문화인 일본의 고분시대


저자는 제10대 스진천황과 제11대 스이닌천황 등은 신라인으로 보고 있고, 뒷날의 제15대 오전천황과 제16대 닌토쿠천황 등은 백제인으로 본다.

일본에서의 고분시대는 서기 3세기 말 내지 4세기 초부터 시작이 되었다고 본다. 그 무렵에 만들어진 고분은 기내로부터 세도내해 연안 각지로 퍼지면서 큰 분구의 생김새들이었다. 더구나 그 당시의 고분들은 신라 백제에서처럼 드높은 분구를 만든 수장을 매장하는 고분들이어서 발전된 토목기술로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대형고분을 만들기 위해서는 노동력도 많이 들었을 것이다.

고분은 시대의 진행에 따라서 그 축조형태가 변해갔다. 분구묘 다위는 흙을 쌓아 올려서 둥금게 만든 봉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라며 백제, 가야 등에서 볼 수 있는 것 같은 분구로 된 큼 규모의 무덤들이다. 고분은 서기 7세기 경까지 계속해서 형태를 바꾸면서 축조되었던 것을 살필 수 있다. 전기 고분의 대부분은 일반적으로 평야지대로 돌출한 언덕지대의 끝쪽에 단독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이들 고분의 대부분은 이른바 전방후원분이라고 부르는 독특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는 무덤이다. 전방, 즉 무덤의 앞쪽 부분은 모가진 채 펑퍼짐하고, 후원, 즉 뒤쪽은 둥근 봉분 형태로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후원부인 봉분의 둥근 무덤 속에는 수장의 관을 묻었다. 그리고 전방부의 모가진 평지는 제사를 지내는 의식의 터전이다.


P140 - 한민족 기마문화와 야마토 국가 성립과정


지난 2001년 12월 23일, 일본 도쿄의 천황궁에서 지금의 아키히토 일본 천황은 “내 몸속에도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공언해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잇대어 그 이듬해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의 기사에서도 아키히토 일본 천황은 “내 몸속에도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말한 사실을 크게 보도했다. 또한 아키히토 일본 천황은 그날 68회 생일을 맞아서 생일기념 공식 기자회견 자리에서 “한국의 말문화며 문자문화, 불교문화 등이 모두 백제로부터 일본에 건너와서 일본문화를 눈부시게 꽃피워 주었다”고도 진솔하게 찬양했다.

상고 조선 부여족인 기마민족의 일본 진출 루트는 한반도에서 건너와 일본 북규슈 지방을 정복한 뒤에 다시 일본 내해로 들어가서 깊숙한 나루터인 지금의 오사카 바닷가 야트막한 언덕지대에다 왕궁을 세웠다. 그 후 다시 이번에는 그 동쪽 내륙의 산간지대인 나라 지방에까지 진출해서 기마민족의 야마토 정권의 바탕을 만들기에 이른다.

이와 같은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은 가와치 일대의 고대 유적지에서 나온 각종 마구며 유물들의 연대가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까지 살피게 해 주는 점이다. 고대에는 말을 아무나 함부로 탈 수 없었다. 왕이나 왕실의 고관 등 신분이 높아야만 말을 탔다. 또한 말을 사육하고 관장하는 관청의 책임자는 고위급의 지체 높은 관리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