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시대 이야기
『신들의 계보(이하 신통기)』로 유명한 고대 그리스의 시인, 헤시오도스(Hesiodos)는 『일과 날』에서 최초의 시대를 '황금시대(Golden Age)'라 노래하고 있다. 황금시대를 비롯한 네시대 이야기는 오비디우스(Ovidius)의『변신이야기』등에 등장하는 이야기이다.
황금시대(Golden Age)
신들이 맨 먼저 만든 사람은 황금족이었다. 크로노스가 하늘을 다스리는 동안, 인간들은 신들처럼 노동과 근심에 시달리지 않았고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노년의 고통도 몰랐다. 손과 발과 모든 사지는 항상 강하고 건강했다. 기쁨에 가득 찬 신들이 그들을 사랑해서 너른 평야를 가득 채울 만큼 엄청난 수의 가축을 선물했다. 죽을 때가 되면 조용히 부드러운 잠에 빠져들면 되었다. 그들은 살아 있는 동안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졌다. 대지는 먹고 남을 만큼 풍성한 과일을 제공해 주었고, 모든 것이 풍족한 상태에서 평화롭게 그날 그날의 일만 하면 되었다.
운명의 결정에 따라 황금족이 이 세상에서 모습을 참추어야 했을때, 그들은 경건한 수호신이 되었다. 이들은 선을 행하고 정의를 지키며 모든 범죄에 복수하는 자가 되어, 안개 속에 몸을 감추고 온 땅을 돌아다녔다. 사람들에 풍요로움을 선사한 크로노스는 로마신화에서 농경신인 '사투르누스'로 등장한다. 오늘날의 동지에 해당하는 로마 명절에 '사투르날리아(Saturnalia)'라는 명절로 기념된다.
은의 시대(Silver Age)
신들이 두 번째로 만든 사람은 은족이었다. 이 종족은 첫 번째 사람들과는 몸의 모양이나 성질이 달랐다. 재롱을 부리던 어린 아이는 백 년이 지나도 여전히 정신적으로 미성숙해 보무 집에서 살며 어머니의 품을 떠나지 못했다. 그러나 막상 장성하여 청년기에 이르자 살날이 얼마 남지 않게 되었다. 이 새로운 인간 종족은 멋대로 행동하여 비참한 상태로 빠져갔다. 욕심을 더 이상 누르지 못하고, 교만한 나머지 서로에게 나쁜 짓을 했기 때문이었다. 신들의 제단에 마땅히 바쳐야 할 제물도 바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우스는 이 종족을 땅에서 다시 거둬갔다. 신들을 숭배하지 않는 것이 제우스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죽고 나서 어떤 명예도 얻지 못할 만큼 나빴던 것만은 아니었다. 은족이 죽고 나자 제우스는 그들을 불멸의 신이 아니라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마신(魔神,demon)으로 지상을 헤매게 했다.
[통합논술 세미나]
〈엔트로피〉 1. 진보의 한계
■ 책 소개
<엔트로피>
제러미 리프킨 지음/이창희 옮김/세종연구원
현대인들은 기술이 발달하고 생산력이 높아질수록 인간의 삶은 더욱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게 진실이라고 학교에서 배운다. 그런데 이상하게 물질 생산 능력은 갈수록 발달하는데 우리의 삶의 질은 별로 나아지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 이유가 무엇인지 해명하는 많은 이론이 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극심한 대립도 이 논란을 반영한다.
미국의 문명 비평가 제러미 리프킨은 전혀 다르게 본다. 그의 눈에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결국 과학기술이 발달해야 인간 삶이 나아진다고 보는 점에서 똑같다.
<엔트로피>의 주제는 간단하다. “우리 문명의 미래는 물리적 제약 없이 무한하게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은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 풀무질
대부분의 현대인은 과학기술의 발달로 세계는 더 가치 있는 방향으로 전진해간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런 세계관은 불과 400년 전에 형성됐을 뿐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역사를 지속적 쇠락 과정으로 봤다. 그리스 신화는 역사를 다섯 단계로 구분하는데, 각 단계는 이전보다 쇠퇴한다. 그리스 역사가 헤시오도스는 이 단계를 황금시대, 은의 시대, 청동시대, 영웅의 시대, 철의 시대로 나눴다. 풍요와 만족의 시대인 황금시대가 가장 좋다. 마지막이 철의 시대로, 헤시오도스는 기원전 8세기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올바른 사람, 착한 사람, 맹세를 지키는 사람은 아무런 혜택도 누리지 못하고 악한 일을 하는 사람과 오만한 사람만 명예를 얻는다. 정의는 폭력에서 나오고 진실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리스인들은 우주는 궁극적인 혼돈을 향해 나아가고 이때 신들이 나타나 태초의 완벽한 상태로 회복한다고 봤다. 순환론이다. 오늘날 남아 있는 극소수의 수렵채취사회에서 먼 옛날 인간 삶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수렵채취사회에서는 일주일에 12~20시간밖에 일하지 않고 나머지는 스포츠·예술·음악·춤·제례의식을 즐긴다. 많은 수렵채취사회는 서로 돕고 나누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기독교적 세계관도 현대와 다르다. 서유럽 중세를 지배했던 기독교 역사관은 이 세상 삶을 다음 생을 향해 가는 중간 과정으로 생각했다. 기독교 세계관은 그리스적 순환 개념은 버렸지만 역시 역사를 쇠락의 과정으로 인식했다. 기독교 신학에서 역사는 분명한 시작과 과정, 종말이 있다. 창조, 구원, 최후의 심판이 그것이다.
역사를 쇠퇴의 과정으로 본 그리스인들
그런데 현대적 세계관은 완전히 다르다. 현대는 기계의 시대다. 정밀·신속·정확이 가장 중요한 가치다. 이런 기계론적 세계관은 프랜시스 베이컨, 르네 데카르트, 아이작 뉴턴 등 세 사람의 공동작품이다.
1620년에 펴낸 <신기관론>(Novum Organum)에서 베이컨은 “고대 그리스인들은 주장은 거창하지만 인간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실험은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고 비판했다. 그리스인에게 과학이란 사물의 형이상학적인 “왜”를 탐구하는 거지만 베이컨에게 학문이란 사물의 “어떻게”를 연구하는 것이었다. 베이컨에 따르면 객관적 지식으로 무장하면 모든 자연물을 지배할 수 있다.
데카르트는 세계를 이해하고, 암호를 풀고, 인간의 목적에 맞게 통제하는 열쇠는 단 한 가지, 바로 수학이라고 생각했다. “수학은 모든 것의 원천이다.” 데카르트는 자연을 단순히 움직이는 물체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그는 모든 질적인 것을 양적인 것으로 대체했다.
뉴턴의 3대 법칙, 즉 관성의 법칙, 가속도의 법칙, 작용 반작용의 법칙은 출판되자마자 유럽 주요 대학의 교재로 쓰였다. 기계론적 세계관은 운동하는 물체만을 다뤘다. 왜냐하면 운동하는 물체만이 수학적으로 측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세계관은 기계를 위한 것이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다.
사물의 질서는 공식화할 수 있는데 왜 사회는 안 그럴까? 근대인들은 “우주를 지배하는 자연의 법칙을 인간 사회가 따르지 않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렸다. 이에 중요한 구실을 한 사람이 존 로크와 애덤 스미스였다. 로크에 따르면, 쓸데없는 관습과 미신을 타파하고 나면 인간 사회는 구성원의 재산축적을 보호하고 허용해야 한다는 단 하나의 목표만 남는다.
“인간을 악하게 만드는 것은 부가 희귀하고 부족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성상 획득을 추구하기 때문에 사회가 가진 부의 총량을 계속 늘려가기만 하면 사회의 조화는 끊임없이 개선될 것이다.”
“사회적 부가 부족하면 인간이 악해진다”
아직도 스리랑카에 남아 있는 원시부족인 베다족. 강재훈 기자 |
로크 이래 개인의 생존 의미와 목표는 오직 생산과 소비로 전락해버렸다. 애덤 스미스는 움직이는 천체가 자연의 일정한 법칙을 따르는 것처럼, 경제도 법칙을 따라야 성장한다고 봤다. 정부의 규제·통제 때문에 경제 혼란이 발생한다는 스미스의 이론에 따르면 자유방임이 가장 효율적이라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이런 기계론적 세계관은 1859년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의 출판으로 최대 승리를 거뒀다. <진화론>에서 말한 자연도태의 개념은 적자생존의 개념으로 변형됐다.
기계론의 가장 큰 특징은 진보라는 개념이다. 진보란 ‘덜 질서 있는’ 자연적 세계가 인간에 의해 이용되어 ‘더 질서 있는’ 물질적 환경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제러미 리프킨의 <엔트로피>는 이런 생각이 실현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열역학 제1법칙은 우주 안의 모든 물질과 에너지는 불변하며, 따라서 창조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단지 그 형태만 바뀔 뿐이다. 제2법칙(엔트로피의 법칙)은 물질과 에너지는 한 방향으로만 변한다고 규정한다. 유용한 상태에서 무용한 상태로, 질서 있는 상태에서 무질서한 상태로만 변한다. 이 방향을 되돌리는 건 불가능하다.
엔트로피 법칙에 따르면, 지구에서든 우주에서든 질서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더 큰 무질서를 만들어내야만 한다. 따라서 엔트로피 법칙은 역사가 진보의 과정이라는 가설뿐만 아니라 과학과 기술이 질서 있는 세계를 창조할 것이라는 가설을 파괴한다.
■ 마치질
공자는 리프킨과 같은 생각을 했을까?
제러미 리프킨은 <엔트로피> 1장에서 그리스와 기독교의 역사관을 소개하면서 그들에게는 진보라는 관념이 없었다고 본다. 그들은 이미 엔트로피 법칙을 깨달은 사람들이다. 리프킨은 서유럽의 역사관만 소개했으나 사실 동양에서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유교 역사관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상고주의(尙古主義)다. 국어사전은 ‘옛날의 문물을 귀히 여기고 숭상하며 그것을 모범으로 삼는 주의’라고 설명한다.
공자 |
공자(사진)의 <논어> 술이편(述而篇)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子曰 述而不作 信而好古 竊比於我老彭
( 공자가 말하기를 나는 옛것을 풀어 설명할 뿐 창작하지 않았다. 옛것을 믿고 좋아하기로 한다면 나를 노팽에 비유하고자 한다.)
노팽은 은나라의 현인으로 알려져 있다.
공자가 말한 옛것은 ‘고대 성인들의 말씀과 정치’다. 성인은 요임금, 순임금, 하나라의 우임금, 은나라의 탕임금, 주나라의 문왕과 무왕이다.
공자는 기원전 551년에서 479년까지 살았다. 공자가 살던 시대는 흔히 춘추시대(기원전 770~기원전 403)라고 부른다. 이때는 주나라의 왕권이 쇠퇴해 제후들끼리 서로 싸우고 쟁패하는 거대한 혼란기였다.
공자는 ‘고대의 질서’가 없어지고 ‘현재의 혼란’이 발생한 원인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그리고 결론에 이르렀다. 옛 성인들의 정치가 제대로 실행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게 공자의 생각이었다.
공자는 고대 성인들이 했던 것(作)을 기원전 500년대 사람들에게 설명(述)해, 옛 성인시대를 회복하고자 했다. 공자에게 고대는 이상적인 완벽 세계요, 현세는 불완전한 혼란 세계였다.
공자의 학통을 이은 맹자(기원전 327?~기원전 289?)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살던 시대는 전국시대(기원전 403~기원전 221)였다. 이 시기에는 춘추시대보다 제후들끼리의 싸움이 더 격렬해졌다. 전쟁이 잦으니 백성들의 삶은 당연히 궁핍했다.
맹자 역시 선왕지도(先王之道)를 자주 언급했다. 여기서 선왕은 곧 옛 성인을 말한다.
“후세를 본받을 수 없는 것은 후세의 사람이 선왕의 도를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왕의 법을 지키면서 과오를 범하는 자는 없다.”
“정치를 하면서 선왕의 도에 의하지 않는다면 지자(智者)라고 할 수 있겠는가?”
맹자 역시 고대는 이상적이고 후대는 퇴행적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시간 흐름에 따라 모든 것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봤듯이, 공자나 맹자 역시 시대의 추이에 따라서 소중하고 가치가 있는 것이 퇴폐해 간다고 보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유교의 역사관은 복고주의(復古主義)로 흐른다. 과거의 정치·사상·문화·제도·풍습 따위로 되돌아가려는 태도다.
과거에 비해 현재가 올바르지 않고 무질서하다면 미래는 현재보다 더 올바르지 않고 무질서할 것이다. 한데 이런 역사관은 몇 가지 문제가 있다.
가장 큰 건 고대가 항상 옳다는 것보다는 ‘올바른 게 이미 주어져 있다’는 점이다. 고대 성인의 말씀과 정치라는 올바른 게 이미 제공되어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그 어떤 의문이나 분석, 해석도 금지된다. 따라서 논쟁이 불가능하다.
■ 담금질
“어떻게”보다 “왜”가 중요하다
요즘 모바일 메신저인 카카오톡이 뜨고 있다. 지난해 3월 처음 나왔는데 채 2년도 안 돼 가입자가 2500만명이 넘을 정도로 인기를 끈다. 소프트웨어 분야는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산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이 위력을 보여줬다. 한데 카카오톡을 만든 회사 ‘카카오’ 이사회의 김범수 의장 이력은 독특하다.
1992년 삼성에스디에스(SDS)에 입사했던 그는 1998년 ‘한게임’을 만들었다. 이 한게임과 네이버커뮤니케이션이 2000년 합병해 탄생한 회사가 엔에이치엔(NHN)이다. 엔에이치엔은 국내 최대 포털 네이버와 국내 최대 게임사이트 한게임 등을 운영한다. 2007년 8월 네이버를 떠난 뒤 몇 년 소식이 뜸했던 그는 갑자기 카카오톡을 들고 나타났다. 부침이 심한 인터넷 분야에서 한 사람이 여러 번 성공하기는 쉽지 않다. 이런 면에서 김범수 의장은 ‘스타 시이오(CEO)’라고 불린다.
그런데 그는 지난 10월19일 경제전문지 <머니투데이>와 한 인터뷰에서 “악착같이 살지 말라”고 했다. 성공한 사람은 대개 노력의 중요성을 말하는데 그는 달랐다. 김 의장 인터뷰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스티브 잡스 |
“영화 <올드보이>를 보면 15년을 가두잖아요. 최민식이 ‘어떤 놈이 대체 날 가뒀나’ 고민하고 관객들도 그 느낌을 쫓아가죠. 하나씩 비밀이 풀어지니까 ‘저래서 가뒀구나’ 하죠. 그런데 영화가 끝나나 싶었는데 유지태가 딱 한마디 합니다. ‘당신이 틀린 질문을 하니까 틀린 답만 찾을 수밖에 없다’고. ‘왜 가뒀나가 아니라 왜 풀어줬나가 올바른 질문이다’라고 말이죠. 거기서 땅 때리는 느낌을 받았어요.”
김 의장은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보다 문제를 인지하는 능력, 문제를 정의하는 능력이 어마어마하게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리더의 능력은 답을 찾아주는 게 아니라, 질문을 할 줄 아는 것 같아요. ‘어떤 어떤 문제를 풀어봐’라고 말이죠. ‘어떤’ 문제를 풀어보라고 할지가 경쟁력이죠.”
김 의장은 ‘어떻게’보다 ‘왜’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인문학은 근본적으로 ‘왜’냐고 묻는 학문이다. 이에 비해 실용성 학문들은 ‘어떻게’를 중시한다. 10월5일 사망한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사진)는 인문학을 중시했다. 잡스는 지난해 1월27일 아이패드 발표회장에서 “애플은 인문학과 기술(liberal arts & technology)의 접점을 찾고자 노력했다”는 말을 남겼다.
잡스는 항상 본질을 추구했다. 잡스는 리드대학을 한 학기 만에 중퇴한 뒤 철학과 인문학 강의를 몰래 들었다. 이러한 잡스의 성향은 독특한 경영 철학으로 발전했다. 복잡하고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과감히 덜어내고 본질만을 구현하려고 했다.
그래서 요즘 인문학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한데 여기에서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쓸모없다던 인문학이 자본주의 극대 발전기에 다시 주목을 받는 건 역시 인문학이 ‘쓸모 있다’는 게 여러 사건을 통해 증명됐기 때문이다.
■ 벼리기
아래 논제를 읽고 글을 쓴 뒤, <아하! 한겨레> 누리집(www.ahahan.co.kr)에 올려 주세요. 잘 쓴 글을 선택해 ‘통합논술 세미나’에 실어 줍니다.
1. 아래글을 읽고 ‘물화된 세계관이란 무엇인가’에 관해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글을 써 보시오. (800자)
① 데카르트는 자연을 단순히 움직이는 물체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그는 모든 질적인 것을 양적인 것으로 대치했고 “중요한 것은 오직 공간과 위치이다”라고 의기양양하게 주장했다. “외연(外延)과 움직임만 알면 우주라도 만들어낼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데카르트의 수학적 세계에는 맛도 색도 냄새도 없다. 뭔가가 흘러나오거나 뚝뚝 떨어지거나 엎질러지는 일도 없다. 결국 대수와 기하처럼 깔끔하고 얌전한 것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수학은 총체적 질서의 표현이며, 따라서 데카르트는 자신의 천재성을 한번 휘둘러 무질서하고 혼란스럽고 살아 있을 가능성이 있는 모든 것들은 쓸어내버린 것이다.
<엔트로피> 제1부 ‘기계론적 세계관의 창시자들’
② 중요한 것은 “조작”, 즉 효율적인 처리방식이다. 인간에게 세계는 항상 카오스(혼란)로 묘사되고 이것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종합하는 것은 구원이 된다. 근대과학으로 나아가는 도정에서 인간은 ‘의미’를 포기한다. 계산 가능성과 유용성이라는 척도에 들어맞지 않는 것은 계몽에 의심스러운 것으로 여겨진다. 계몽은 통일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은 아예 존재나 사건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계몽의 이상은 세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도출해낼 수 있는 ‘체계’다.
계몽에는 ‘세계의 계산 가능성’이 중요하다. 그래서 숫자는 계몽의 경전이 되었다.
계몽은 모든 걸 물질적 대상으로 취급한다. 모든 걸 ‘계산 가능한 존재’로 환원시킨다. 이것만이 ‘객관적’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물화(物化)다. 정신이 물화되면서 사람들 간의 관계나 개개 인간의 자신에 대한 관계도 악령에 사로잡힌다. 애니미즘이 사물을 점령화했다면 산업주의는 영혼을 물화한다. <계몽의 변증법> 중에서 ‘계몽의 개념’ 요약
2. 다음 존 로크의 말을 ‘트리클다운’ 이론의 관점에서 설명해보시오. (600자)
자신의 노동으로 땅을 경작하는 사람은 인간 공통의 부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늘리는 것이다. 경작되는 1에이커의 땅에서 나오는 생산물은 똑같은 지력을 지닌, 그러나 자연 상태로 버려진 1에이커의 땅에서 나오는 산출물보다 열 배 정도 많고, 따라서 인간의 삶을 더욱 잘 지탱해줄 수 있다. 그러므로 자기 소유의 땅에 울타리를 치고 경작하는 사람은 10에이커의 땅만 가지고도 자연 상태의 100에이커 땅에서 나오는 산출물을 생산해낼 수 있으므로 결국 90에이커의 토지에서 나오는 산출물을 인류의 풍요를 위해 바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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