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상제님이 밝혀주신 선천 성자들의 구원론의 실체
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 먼저 오늘 말씀의 주제 성구인 2편 40장을 보겠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고
불교도는 미륵의 출세를 기다리고
동학 신도는 최수운의 갱생을 기다리나니
‘누구든지 한 사람만 오면 각기 저의 스승이라.’하여 따르리라.
‘예수가 재림한다.’하나 곧 나를 두고 한 말이니라.
공자, 석가, 예수는 내가 쓰기 위해 내려 보냈느니라.(道典2:40:1∼6)
이 말씀은 인류 문화의 국지적인 일면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선후천을 초월하여 보편적인 천지 이법을 바탕으로 인간 역사의 핵심 문제를 지적해주시는 말씀입니다. 즉, 우주의 통치자 하나님이신 증산 상제님이 선천 성자들 누구도 언급하지 못한 진리의 기본 주제를 직접, 너무도 쉽고 간결한 언어로 정리해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특히 한평생 기도 생활을 해 온, 구도의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너무도 큰 의미를 심어줍니다. 동서양 인류의 종교 역사의 지평을 확대해서 보면, 우리 인류에게 구원에 대하여 이보다 더 포괄적인 의미를 전해 주는 말씀이 흔치 않습니다.
그러면 1절부터 말씀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2천 년 기독교 역사의 아버지 하나님
예수가 말한 아버지 하나님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고 불교도는 미륵의 출세를 기다린다.”
상제님은 지금 1절과 2절에서 동서의 2대 종교를 정리하고 계십니다. 서양 기독교와 동양 불교의 구원론의 최종 결론을 그들을 내려 보내신 하나님이 지상에 인간으로 강세하셔서 직접 정리를 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즉, ‘너희 들이 기독교를 알려면 예수 재림설의 실체를 알고, 불교의 구원론을 알려면 미륵불 출세의 실상에 대해서 제대로 깨달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먼저 1절을 볼까요.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나니” 여기서 예수 재림 문제가 나옵니다. 예수 재림이란 기독교 구원론의 총결론으로서‘심판의 그날, 우리 주님께서 천사장의 나팔 소리를 들으시며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을 영접하고 믿는 자는 주님이 오실 때 그 영광 속으로 하늘에 들어 올려져서 천국으로 가고, 믿
지 않는 자는 영원한 멸망을 맞이한다는 것입니다. 이 휴거설이 바로 기독교 2천년의 종말 신앙 역사에서 구원론의 총 결론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본래 가르침이 무엇입니까?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로다. 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니라’(He has sent me). (요한복음 7:28~29)
예수는 스스로를‘하느님의 아들’, ‘사람의 아들人子’이라 하였을 뿐, 자신이 바로 하느님이라고 말한 구절이 성경에 단 한 곳도 없습니다. 알고 보면 예수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버지를 외치고 있습니다. 이 우주는 그 중심에 온 하늘땅을 다스리시는 아버지 하나님이 계신다, 그 아버지를 증거하러 왔다고 했습니다. 사실 예수는 지상에 건설되는 아버지 하나님의 나
라, 성부 하나님이 지배하는 지상천국시대를 선포하러 온 것입니다.
또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신자들에게 세례를 줄 때, 예수가 다가가서 “나에게도 세례를 주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하고 세례를 받습니다. 예수가 세례를 받고 물에서 나올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옵니다. 그 때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는 소리가 울려옵니
다.(마태복음 3:13~17)
1906년에 출판된 <국한문 신약전서>를 보면 예수에 대하여‘上帝의 子예수그리스도’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라는 겁니다. 이것을 누가 정확히 봤냐 하면 예수의 수석제자인 베드로입니다.
어느 날 예수가 제자들 에게“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하고 묻자 베드로가“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 니다.”(마태복음 16:15~16) 하고 신앙 고백을 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베드로가 종통 계승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석가모니가 연꽃 한 송이를 말없이 들어 보이자 빙그레 웃음으로 대답한 가섭에게 종통을 전수한 것과 같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예수는 분명히‘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의 가르침의 결론은 자신을 내려 보내신 아버지가 오시고, 그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가 지상에 건설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왕국[The Kingdom of God] 지상천국 시대의 도래를 선포하는 것이 기독교의 사명입니다.
이에 대하여 세례요한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 때 백성들에게“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Repent,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마태복음3:2)註) 고 선언을 합니다. 기독교의 주제는 이 한 말씀에 압축되어 있고, 여기서 출발을 합니다.
왜 진실이 왜곡된 것일까?
기독교는 2천 년 전부터‘하나님의 나라가 손에 닿을 듯이 가까웠다[the kingdom of God is at hand]’고 했습니다. 2천 년이라는 세월은 인간의 세대로 보면 약 70세대의 긴 세월입니다. 그러나 도의 세계, 대우주를 다스리시는 조화주 하나님의 세계에서 보면 아주 짧은 시간이죠. 천국이 가까웠나니 회개하라! 하나님의 왕국, 천국이 임박했다,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누가 이룬다는 것인가요? 예수를 내려 보낸 하나님 아버지가 직접 계시를 해 주신 놀라운 소식이 있습니다. 그 내용이 기록된 문서가 바로 소위 묵시록이라 하는「요한계시록」입니다. 「계시록」을 보면 어떤 내용이 있습니까?
예수의 열두 제자 가운데 백 살이 넘게 장수하며 기도를 가장 사무치게 한 이가 사도 요한입니다. 그는 로마에 전도하다 혹독한 고문을 받고 밧모섬에 귀양을 갔습니다. 이곳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간절한 기도를 합니다. 마침내 아버지가 계시는 천상 궁전에 불려 올라가 아버지의 백보좌 앞에서 직접 천명을 받으며 앞으로 오는 가을 대개벽에 대해 한 소식을 듣
게 됩니다.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And I saw a great white throne, and him that sat on it, from whose face the earth and the heaven fled away; and there was found no place for them. (요한계시록 20:11)
또 내가 새 하늘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And I saw a new heaven and a new earth: for the first heaven and the first earth were passed away; and there was no more sea.(계시록 21:1)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하시니라.
And he that sat upon the throne said, “Behold, I make all things
new.”(계시록 21:5)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한다.”이것이 2천 년 전 요한을 통해 선언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개벽 메시지입니다. 요한은 앞으로 하늘과 땅의 질서가 바뀌 는 것과 새 질서로 옮겨 앉은 신천지 위에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 건설되는 것을 본 것입니다. 가을개벽의 실제상황이 전개될 때, 그 세계를 열어 주시 는‘크고 흰 보좌 위에 앉으신 하나님’, 그 분이 바로 상제님입니다.
예수가 말한‘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바로 기독교 탄생 이전 수천 년 전부터 동방 신교문화에서 신앙해 온 천상의 호천금궐에 계신 상제님입니다. 하나님의 본래 호칭이 상제님임을 언제나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늘 궁궐에서 상제님을 친견한 요한조차도, 개벽 상황을 신교로 잘 받아 쓰다가 계시록의 마지막에 가서는“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
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계시록 22:21) 하고 예수의 재림을 노래 부 르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계시만 받았을 뿐, 우주의 통치자로서 하나님, 최고신이신 상제님에 대한 참모습을 구체적으로 선포하지 못한 것입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성서 주석본이 수백 가지임에도 이‘새 하늘 새 땅’ 이라는 말을 제대로 해석하는 사람이 없어요. 기독교에는 선후천 개벽관의 우주론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주의 봄여름은 선천 세상이고 가을겨울은 후천이다. 하나님은 이 우주 1년, 즉 12만9천6백년을 한 주기로 대자연을 무대로 삼아 인간 농사를 지으신다. 우주는 약 13만 년을 한 주기로 순환 무궁하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이 천지 창조의 원 설계도, ‘우주 1년 선후천관’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아버지 하나님이 가을철을 맞아 지상에 직접 오셔서 건설하시는 후천 조화선경 낙원의 인류 구원 소식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재림만을 기다리는 기독교인들
그러면 기독교는 어떤 근거로 예수 재림설을 2천 년 동안 확신하고 있으며, 가톨릭과 개신교를 떠나서 모든 신자들이 하나같이 예수 재림을 그토록 믿고 있는 것일까요?
사실 이 문제는 너무도 중요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아버지가 오셔도 아버지를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인간으로 오시는 아버지를 거부한다는 말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아버지 하나님이 138년 전에 인간으로 오셨어!”하면, “아니,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으로 오시냐? 그럼 인간이지 하나님이냐?”라고 반문합니다. 그들의 의식 속에는‘아버지 하나님은 인간으로 오실 수 없는 분’이라고 완전히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는 성령적인 존재이며 또한 인간의 형상을 하고 계신다고 합니다. 창세기를 보면“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 그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나옵니다. 그때의 하나님은 어떤 존재입니까? 그 하나님은 초월적 하나님이죠. 이 우주를 창조하고 이를 초월해 있는 절대자입니다. 그런 절대자 하나님은 영원히 인간으로 오실 수 없고 오직 하나뿐인 외아들을 보내 인간 구원사업을 이루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백보좌 하나님 아버지의 강세로 성취되는 신천지 개벽과 아들의 재림 사건이 모순되는 믿음의 충돌이 일어납니다. 대표적인 예화 하나를 들어보겠어요.
지금부터 한 20년 전에 광주도장에서 강연회를 할 때 겪은 이야기입니다. 상제님 진리를 전해주고 나니까 뒤에 있던 어떤 노신사 둘이서 함께 일어 나 힘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을 하는 겁니다. “아니, 아들이 오는 게 아니고 아버지가 직접 오신다고 했으면 그렇게 똑 부러지게 얘기를 했어야지. 왜 그렇게 구체적인 말씀을 하나도 안 해서 헷갈리게 만들었나요! 우리들이 그동안 모든 걸 다 바쳐서 주님을 위해 한 생애를 보내다가, 이제는 늙어서 여생이 얼마 안 남았습니다. 그런데 상제님 이 진정 아버지로 오신 참 하나님이시라면 과거에 아버지가 오셔서 새 세상을 개벽해주신다고 이런 한마디 정도는 했어야 되지 않습니까. 왜 헷갈리게 하셨습니까?”그러면서 나한테 막 화풀이를 하는 겁니다.
이런 얘기를 자기들 신앙하는 쪽에 가서 해봐야 받아들일 리도 없고 사탄 들린 것처럼 취급을 하니까 상제님 도문에 와서 답답한 심정을 그렇게 토로를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어떤 신인가?
여기서 또 하나 의문이 생기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신앙하는 아버지는 대우주의 주권자, 통치자 하나님이신 상제님이 아니라 여호와신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호와는 과연 어떤 신인가 하는 겁니다. 구약을 보면 가장 많이 나오는 구절이 있습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출애굽기 3:6)
이 내용은 상식으로도 많이 들어봤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이 3박자를 말이죠. 또 에스겔에는“이스라엘 족속이 내 백성인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라.”(에스겔 34:30)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 두 구절만 봐도 여호와는 이스라엘 족속을 약속의 백성으로 삼아 통치를 하는 유대족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본래 아라비아 반도에 뿌리를 둔 유대족의 부족신이자 조상신입니다. 그리고 여호와는 원래 전쟁 전문가인 군신軍神입니다. 중동 지방의 족속 들이 전쟁에 나가기 전에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는, 전쟁 신입니다. 시편을 보면“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시편 24:8) 라고 찬양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또 출애굽기 32장을 보면,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자기의 친구를, 각 사람이 자기의 이웃을 죽이라”하셨느니라.’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임을 당하니라.’라는 구절이 있고, 사무엘상에는‘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육하셨으므로 백성이 애곡하였더라.’ (사무엘상 6:19)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내용을 볼진대 여호와는 때에 따라 생명을 무수히 죽이는 전쟁신입니다.
하나 더 예를 들면, 자기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는데 길을 막는 자는 뱃속에 있는 애까지 다 도륙하라, 멸망을 시키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사무엘상 15:3)고.
얼마 전 가톨릭의 차동엽 신부는 <맥으로 읽는 성경>이라는 프로그램에서“모르는 사람들이 구약을 읽어보면‘아니, 이게 무슨 하나님이냐. 제 백성을 위해서 남의 백성을 씨도 안 남기고 뱃속의 애까지 다 쳐 죽이라 하는분이 무슨 하나님이냐.’라고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말을 들은 적 있습니다. 또 신화의 아버지 조셉 캠벨은 저널리스트 빌 모이어스와의 대담 프로에 서“십계명은‘살인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다음 장章에 가면‘가나안 으로 가서 거기에 있는 것은 모두 죽여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범주가 구속된 사회의 도그마입니다. 참여와 사랑의 신화는 오로지 무리의 안을 맴돕니다. 밖을 향하면 태도는 표변합니다. <이방인>이라는 말이 드러내는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방인과 한솥밥을 먹을 수 없는 것이지요.” 라고 했습니다. 그 내용을 정리한 책이『신화의 힘 The power of myth』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우리나라에도 출간되었습니다. 오직 내 백성만 위하고 타민족은 적대시하는 살육적인 신관으로 인해 지금 이 순간에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싸우는 것입니다. 중동 전역에서 거의 하루걸러 자살 폭탄이 터지고, 서로를 죽이는 참상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신이 유일초월신으로 바뀐 역사 과정
이렇듯 여호와는 때로는 인격신으로, 때로는 성령의 불길로 나타나 명령 을 내리고 계시를 해주는 유대민족의 의식 속에 절대자 창조주 역할을 하는 조상신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전통적인 여호와 신앙이 기독교 신도들의 마음속에서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창조주 아버지 신앙으로 바뀌게 됩니다. 왜 그렇게 된 것일까요? 증산 상제님이 지적해주시는 예수 재림의 심각한 문제점이 여기에 있 는 것입니다.
기독교에는 옛 약속「구약舊約」과 새로운 약속이라는「신약新約」, 두 가지 경전이 있습니다. 「구약」과「신약」을 비교해보면 신관, 인간관, 아버지관의 체계가 다릅니다. 「구약」의 창세기 첫 문장이‘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입니다. 「구약」첫머리에서는 분명히 본래의 조물주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The Maker]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쭉 나가다가 창세기 2장 4절에 이르면 갑자기‘여호와’가 나옵니다. 그러다가「신약」으로 넘어 가면‘여호와’라는 호칭 자체가 완전히 사라지고‘아버지(The Father)’로 만 나옵니다. 여호와신이 구약에는 나오지만 신약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 아버지가 유대족의 여호와신이라면, 왜 신약에는 단 한 번도 여호와라는 호칭이 안 나오고 그냥 아버지일 뿐일까요? 이것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바로 구약의 민족신 신앙에서 원래 우주 만유를 다스리시는 참 하나님 아버지 시대를 여는 신약시대의 인류 보편 신앙문화로 옮겨갔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관 변화의 신·구약(새로운 약속과 옛 약속) 신앙 역사를 추적 하다보면 지적한 바와 같이 이스라엘 고대 민족사의 초기 시대인 모세 오경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지금부터 약 4천 년 전(BCE 2000년경) 아브라함의 족속은 수메르제국 내에 있던 갈데아 우르(Ur:도시국가)지역에 살다가註), 강대국들의 잦은 침입과 기근 등으로 우르가 쇠잔해지자 유프라테스 강을 강을 건너 가나안(현재, 팔레스타인 일대)땅으로 이동합니다. 이때부터 아브라함 족속을 헤브루(Hebrew : ‘강을 건너온 사람’이라는 뜻)라고 부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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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3,500(BCE 1,500)년경 전후에 기근이 들자 헤브루족의 일부는 나일강 유역으로 이동을 하여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아갑니다. 강제노역을 하며 고통과 절망의 삶을 살던 히브리족은 BCE 1,300년 경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를 탈출합니다. 이 때 모세는 민족정신을 하나로 강력하게 묶기 위해, 그들 민족의 하나님인 만군萬軍의 신 여호와와의 계약을 통해‘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10계의 첫 번째 계율)는 유일신 신앙을 선포하게 됩니다. 즉
여호와신이 모세를 통해 시나이 산에서 유대족의 통치자 하나님으로서 계약을 맺고 그 계약이 지속되도록 그들이 지켜야 할 율법(십계명)을 일러 준 것입니다. 이것이 세계종교역사상 유례가 없는 계약종교인 오늘날의 이스라엘 유대교 역사의 출발점입니다.
그 후 헤브루족은 모세를 이은 여호수와의 인도로 팔레스티나 지역에 정착해 살았는데, BCE 1,000경에는 다윗왕이 흩어지고 분열된 족속을 통일하여 히브리왕국을 건설함으로써 약400여 년 간 번영을 누립니다. 그러나 다윗왕에서 솔로몬왕으로 이어지던 통일왕국은 다시 이스라엘왕국과 유대왕국으로 분열이 됩니다. 이스라엘은 209년간(BCE 931~BCE 722년) 존속하다가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망하고, 유대왕국은 345년간(BCE 931~BCE 586년) 존속하다가 신흥강국인 바빌로니아에게 멸망을 당합니다.
유대왕국을 멸망시킨 바빌로니아왕은 솔로몬궁전과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고 재물을 약탈하고, 유대의 지도층을 비롯하여 모든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 바빌론으로 끌고 갑니다. 바빌론에서 노예생활을 하면서 유대족은 자괴감에 빠지고 민족정신이 분열되게 됩니다. 그러자 위기를 느낀 유대족의 선지자들은 여성을 희생양으로 삼아 여자가 원죄를 지어서 이러한 고통을 겪고 있다고 하는 원죄론과 유대족 선민의식과 그들 외의 타종교를 우상숭배로 매도하는 극도의 배타적인 사상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당시는 유대백성들의 고통과 절망과 분노를 해소시킬 무언가가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 2,500여년(BCE 538년)에 이르러 메소포타미아의 새로운 강자 페르시아제국에 의해 바빌로니아는 멸망당합니다. 유대족이 바빌로니아로부터 풀려날 때까지의 약 50년간(BCE 586~538)을 역사에서는 유대족의 바빌론 유수기라고 합니다.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킨 페르시아는 유대인들을 해방시켜 고향인 예루살 렘으로 귀환시킵니다. 그리고 바빌로니아에 의해 파괴된 예루살렘 신전을 재건축하도록 재정지원까지 해주고 종교적 자유인으로 만들어줍니다. 바로 이 때문에 유대인들은 페르시아 왕을 메시아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유대인이 메시아로 인식한 페르시아 왕이 신봉하던 종교가 바로 ‘조로아스터교’였고, 따라서 유대인들은 자연스럽게 조로아스터교의 메시아사상을 유대교 교리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페르시아 왕의 도움으로 고향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은“이 모든 것은 거룩하신 주님의 은총이시다. 유대민족을 선택하신 여호와만이 전지전능하신 유일신이시다!”하고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유대교를 정리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첫째, 신은 여호와 한 분뿐이다. 둘째, 유대민족은 신의 선택을 받았다. 셋째, 인류의 종말이 오고 신이 메시아를 보내어 인간을 구원하신다 하는 유대교의 메시아사상, 유일신 신관이 정립됩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중동지역 유대족의 여호와가 인격신에서 초월신으로, 대우주의 창조주 하나님으로 신격이 변색되어 버립니다. 신관 자체가 지역신에서 우주의 절대자 신격으로 완전히 바뀌어버린 것입니다. 상제님 말씀 그대로 여호와신은 본래 중동의 지방신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이러한 신앙관을 그대로 계승하여 기독교인들은 여호와신을 우주의 조물주로 신앙하고 있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여호와신이 원 조물주이고, 창조주이고, 우주의 주관자로서 인간으로 올 수가 없는 초월신입니다. 그 여호와 신이 인간을 사랑하여 독생자인 예수를 내보냈으며, 예수는 육화한 하나님으로서 심판의 때가 되면 믿는 사람을 건져 올리기 위해 다시 이 세상에 재림한다는 것이죠.
기독교 삼위일체 신관의 진실
기독교의 신관, 인간론, 구원론의 기본 틀을 구성하는 진리의 핵심, 즉 성삼위일체 신관을 보면 아버지가 계시고 그가 보낸 아들, 그리고 제3위位의 하나님으로 성령이 있습니다. 그들은‘하나님은 하나이신 세 분으로서 성부, 성자 성령이시다. 하나님은 구별되는 세 인격
이며, 그 세 인격들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이시다’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그 본질은 하나이며 현실 사역에서는 세 위격의 하나님으로 나누어져서 각각 다른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창조를 하시고, 아버지가 보낸 아들은 그 능력과 신성이 본질적으로 아버지와 동일한 하나님으로서 구원의 사역을 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이 하고자 하는 모든 일, 구원과 진리에 대한 깨달음과 기도에 대한 감응과 성취라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손길에 의해서 이뤄지는 것도 있지만 아버지로부터 온 영, 아들로부터도 오는 영, 즉 성령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서기 313년, 동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게 됩니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시대만 해도 이 삼위일체론은 확고하게 정립된 정통 교리가 아니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성부聖父이신 아버지 하나님을 창조주로서 법신法身적인 우주의 주권자로서 천상 궁전의 옥좌에 앉아 실제로 인간과 신들에게 명을 내리며 통치하시는 인격신으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오직 만유 생명체의 ‘존재의 근원’으로 계시는 초월자, 절대자, 형이상학의 신과 창조주 신으로 받들고 있지요. 그러므로 그들에게 이런 아버지 하나님관은 인간 세상에는 영원히 올 수 없는 분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아버지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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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가지 기독교인들이‘인간 세상에 오시는 참 하나님 아버지’를 영원히 못 찾게 해버린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영지주의靈知主義의식으로 쓰여진 또 다른 한 권의 복음서, 「요한복음」1장에 나오는 이 구절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and the Word was with God,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and the Word was God. (요한복음 1:1~3)
기독교인들의 논리를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곧 아버지의 아들 예수(육화한 말씀 : incarnated logos)로 성육신되었으니, 그분은 살아 계신 말씀인 하나님의 현현이요 계시이며 인지되는 모든 현상 세계의 근원이다. 이것은 역사상 가장 분명한 임재하심이다.’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가톨릭의 교황이 됐든, 신부가 됐든, 개신교 목사가 됐든, 장로가 됐든, 어린이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신도 누구를 불러다놓고 물어봐도 한결같은 대답을 합니다. “아버지는 전지전능하시고 만유의 근원으로 본래부터 완전자로 계시고, 우리 주 예수님만이 바로 이 아버지가 보내신 유일한 독생자요 구원의 하나님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꼭 다시 오신다.” 고 말입니다.
이러한 여호와 신관이 복잡하게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상제님은“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의 재림을 기다린다. 석가 공자 예수 모두 내가 내려 보낸 성자들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기독교는“예수는 내가 쓰기 위해 내려 보냈다.”는 말씀을 망각하고 지난 2천년 동안, 예수를 내려 보낸 대 우주의 주재자요 통치자이신 참 하나님 아버지의 강세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예수의 재림을 기다려왔다는 말씀입니다.
결론적으로 유대족은, 예수가 탄압을 받고 죽었다가 하늘로 올라갈 때 분명히“아버지 하나님의 우편으로 간다.”고 했는데도 아버지 하나님의 복음을 왜곡하여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아버지 상제님이 이 문제를 가지고 2천년 동안 깊은 고민을 하신 겁니다. 기독교인들이 아버지를 찾으면서 처절하게 기도를 하는데 그 아버지를 전부 유대족의 신 여호와로 알고 있으니 그 기도가 참 하나님이신 아버지 상제님께 전혀 상달이 안 된단 말입니다. 그것을 쐐기 박기 위해서 2천 년 전에 상제님은 천 상 백보좌에서 사도 요한을 끌어올려 새 하늘 새 땅 신질서를 창조하시는 가을 천지개벽의 실제 상황을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으로 오셔서 충청도 금산의 예배당에 가시어 기독교의 잘못된 아버지 신관을 직접 심판을 하셨습니다.
임인(壬寅: 도기 32, 1902)년 가을에 하루는 상제님이 호연이를 데리고 금산의 한 예배당에 가십니다. 그 때 목사가“하느님이 이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님을 주셨으니 누구든지 맘 변치 말고 믿으면 영생을 얻으리라 하셨습니다. 자, 우리 서로 서로 손잡고 함께 믿읍시다.”하고 열 변을 토하고 있었습니다. 상제님이 그 설교를 들으시고는 단상으로 나가시 며“그렇게 가르쳐서는 안 되느니라! 천지만사의 이치란 천지에 모여 사는 사람들 속에 있는 것이거늘 네 어찌 중생을 속이느냐! 중생들을 그릇 인도 하면 천지의 원 주인도 자리를 잡지 못하느니라!”하시며 환부역조換父易祖의 큰 죄를 호되게 꾸짖으십니다. 그리고“벼락신장은 어디 있느냐. 속히 벼락 을 치라!”하고 건물이 흔들리도록 큰 음성으로 천상의 벼락 신장한테 벼락 을 때리게 하십니다.(道典5:17~18)
천지의 원 주인으로서 아버지 하나님이신 조화주 상제님이 친히 기독교 교당에, 그릇된 아버지 신관의 구원 신앙에 개벽을 때리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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