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공사의 비밀

증산 상제님의 천지공사의 생생한 현장

천부경81자 2011. 2. 7. 10:43

 

 

 

증산도 성지순례 - “내가 이제 천지의 판을 짜러 회문산回文山에 들어가노라”
 김명렬 (증산도 본부)
 
 증산도의 도조이신 상제님께서는 회문산(回文山)을 후천의 아버지산이라고 말씀하셨으니(증산도도전 4:19:4), 회문산은 곧 회부산(回父山)이다. 한자의 의미로도 문(文) 자는 곧 부(父) 자와도 그 뜻이 통한다. 또 일찍이 상제님께서 회문산에는 오선위기(五仙圍碁)와 24혈(穴)이 있어 큰 기운을 간직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회문산은‘큰지붕’으로 불리다가 홍문대사(洪成文)가‘회문산가’를 지은 이후 회문산이라 불려졌다고 전한다. 임실·정읍·순창의 3개 군의 경계에 자리한 회문산의 정상인 회문봉(回文峰큰지붕 830m)을 중심으로 북서쪽으로 장군봉(투구봉 장군이 투구 쓴 형국 780m)이 있고, 회문산의 좌청룡인 천마봉과 깃대봉의 동쪽 산줄기는 천마승공형(장군이 탄 말이 하늘로 날아가는 형상)이라 하고, 또 우백호인 돌곳봉과 시루바위의 남쪽 산줄기는 갈마음수형(목마른 말이 물을 먹는 형상)이라한다.
 
 물줄기는 구림천을 통해 섬진강에 합수되어 남해의 광양만으로 흘러들어, 지형적으로 피난처로 삼거나 방어하기에 천혜의 유리한 조건을 갖춘 곳이다.
 
 『강대국의 흥망, The Rise and Fall of the Great Powers, 1988』의 저자로 잘 알려진 폴 케네디 교수(예일대)는 얼마 전 한국을 방문하여“한국은 네 마리의 코끼리 사이에 낀 작은 동물이므로, 한마리의 코끼리를 위한 정책을 펴면 다른 코끼리가 화를 낸다”는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했다. 강대국과 약소국 간의 국제정치 역학 관계를 나름대로 지적한 말인데, 폴 교수가 상제님께서 이곳 회문산의 오선위기혈에 단주해원도수에 붙여 다섯 신선이 바둑을 두는 형국으로 이 세계 역사를 잡아 돌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얼마나 경악할까?
 
 오늘은 상제님께서 보신 회문산 오선위기 공사 중에 진주천자도수의 두 주인공을 더불고 공사 보신 현장과 태조도수와 관련된 만일사(萬日寺)를 순례한다.
 
 
 좌우이념 대립의 구절양장 구절재
 해 짧은 겨울날 어두운 호남고속도로의 새벽을 달려 회문산으로 향하던 중, 모악산을 지날 때 순례자 일행은 붉게 물든 햇귀를 보았다. 칠보면 소재지에서 아침을 먹고 회문산을 향해 다시 출발하니 어느새 일행을 실은 자동차는 구절재를 넘어가고 있었다.“ 물이 나와 불을 쓰리라.”(증산도 도전5:198) 하신 공사 말씀 그대로, 지금은 물을 이용하여 불[전기]를 생산하는 칠보발전소 왼쪽으로 지나치고 있다. 칠보산은 옛날부터 산에서 불이 뿜어져 나온다는 전설이 전해져 화경산(火鏡山)이라고도 불리었는데, 현재 행단 사람들은 칠보 발전소를 화경폭포(火鏡瀑布)라 부른다. 산외 목욕리 마을에는 이 화경산의 화마를 막으려고 솟대가 세워져 있다.
 
 지난 한국전쟁 당시에는 이 구절재를 중심으로 산내면에서 회문산 쪽으로는 빨치산이 기승을 부리는 조선인민공화국이었고, 산외면 쪽으로는 대한민국이었다. 구절양장(九折羊腸)의 구절재 그 분수령(分水嶺)이 좌우이념 대립의 분수령이 되었던 것이다. 하루빨리 통일이 와서 막혀있는 휴전선을 자유로이 넘나들 수 있기를 고대하며 태인 군신봉조혈을 지나 운암호에 접어들었다. 올 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씨라 푸른 호수가 그 어느 때보다도 거울같이 해맑은 모습으로 일행을 반겨주었다.
 
 
 두주막거리와 진주도수
 일행이 산내교를 건너자 두주막거리가 나왔다. 일전에 만났던 두주막거리에 살던 할아버지의 증언에 의하면, 원래 두주막거리는 아래쪽에 있었는데 운암호가 생기면서 수몰돼, 물속에 있던 그 두주막이 현재의 자리로 그대로 옮겨왔다고 한다.
 
 증산 상제님께서는 저 물속에 있었던 두주막에서 차경석 성도와 문공신 성도를 더불고 진지도 드시고 막걸리도 한잔하셨다. 그런데 두주막거리, 그 이름부터가 의미심장하다. 회문산 오선위기 진주도수의 음양도수를 맡은 문공신, 차경석 두 성도님이 천상으로 가셨듯이 물속에 있던 두 주막은 지금 이 땅에서 다시 볼 수 없다. 하지만 옮겨진 자리에서 두 주막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진주도수를 성사재인시키는 사람 둘(증산도 도전 10:27:3)은 도성덕립의 그날을 위해 이땅에서 역사(役事)하고 있다.
 

 농바우에 계실 때 하루는 상제님께서 문공신(文公信)과 차경석(車京石)을 데리고 노루목을 지나 두주막거리 주막에 이르시어 밥과 술을 드신 뒤에 장검산(長劍山) 아래 이화동(梨花洞)으로 가시니라.
 
 이 때 상제님께서“경석아, 나하고 목욕하자.”하시며 개울에 들어가시거늘 경석이‘쌀쌀한 날씨에 저러시는 데는 필시 연유가 있다.’생각하고 상제님을 따라 물속으로 들어가니라.
 
 이에 공신도 따라 들어가려 하니 상제님께서 들어오지 못하게 하시매 밖에서 구경을 하는데, 문득 상제님께서 경석의 다리를 잡고 외치시기를“이게 도둑놈 다리다!”하시니라. 이후 회문산 각처에서 여러 공사를 행하시고 사실재를 넘어 돌아오시니라. (증산도 도전道典5:179:1∼6)

 
 
 이화동과 대흥리
 두주막거리에서 장금터널을 지나자 장군이 투구를 쓴 형국이라는 써래봉과 장군봉(투구봉, 어깨봉 780m)에서부터 북쪽으로 펼쳐진 이화동(梨花洞) 계곡을 만났다. 이화동의 또랑또랑한 맑은 물을 바라보면서 상제님과 차경석 성도의 목욕장면을 그려본다.
 
 물속으로 함께 들어가시어“이게 도둑놈 다리다”하신 공사와 대흥리 냇가에서 소금 뿌리시고“큰 이무기를 잡았다”하신 공사(증산도 도전 6:54)와의 연계성을 사색해 본다. 중요한 공사는 거듭하여 빈틈없이 보시는 상제님의 세세밀밀함을 생각하면서, 이곳 이화동에서 나의 허물이 다 씻겨 나가길 간절히 빌면서 차가운 물속에 손을 담가 본다.
 
 
 종성리와 호남의병
 


 한말에 국운이 기울고 일제가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시키며 침략의 마수를 뻗치던 무렵, 회문산 일대는 호남 제1일의 항일 의병 운동의 거점이었다. 회문산 인근의 정읍 방면에서는 면암 최익현(崔益鉉, 1833~1906) 의병장(증산도도전 5:139)이, 임실 방면에서는 돈헌 임병찬(林秉瓚, 1851~1916)의병장이 구국운동을 했다. 특히 순창방면의 양윤숙(楊允淑, 1875~1910) 의병장은 1천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회문산에 웅거하면서 왜적과 싸웠다.
 
 호남 의병이 창의했던 원종성 마을에 올라가니 군신봉조혈이 자리한 태인이 한눈에 들어왔다. 해발 500m 고지에 세워져 있는 마을현판을 보니, 호남의병 창의 당시의 병기 제작소와 화약제작소, 최익현 의병장의 숙영지 등이 표시되어 있다. 당시 의병들의 함성이 귓전에 쟁쟁하게 다가오는 듯하다.
 
 당시 면암 최익현은, 문공신 성도가 다녔던 칠보 원촌의 무성서원(증산도 도전 3:202)에서 창의하여 이곳 종성리로 옮겼다. 종성리에서 만난 70대 노인은“우리 집안이 9대째 회문산에서 사는데, 우리 외할아버지가 장씨였어. 덕치에 살았는데 그때 최익현 밑에서 항일의병투쟁을 했어!”라고 말씀하신다. 참으로 반가운 증언이다. 이야기가 재미있어 더 말씀해달라고 부탁하자, 당시 임병찬이 잡힐 수밖에 없었던 비화를 들려주었다. “임병찬의 며느리가 순창 군수 딸이여! 긍게 순창 군수하고 임병찬이 하고는 사돈잉 게지 그치? 근데 최면암이 임병찬에게“순창 군수 목을 가져와라”하고 군령을 내려버렸당게. 근데 사돈 목을 베자니 거시기해서 걸 못해 번졌당게. 그러다가 남원에선가 옥과에선가 되레 순창 군수에게 잡혀버렸당게. 사돈한테 잡힌 거지. 그래서 거문도로 유배갔다고 하더라고…. 그때 목을 베었더라면 안 잡혔을 텐데 인정 때문에 되레 잡혔어.”짤막하지만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현장감이 생생히 배어 있었다. 이 노인이 들려준 이야기에서‘거문도’는‘대마도’를 말하는 것이다.
 
 

 


 솔봉 전망대
 솔봉 전망대에서 북쪽을 바라보니 모악산이 위엄을 떨치며 당당하고 기개 있는 모습으로 서 있었다. 얼마나 장엄한가! 뿌듯한 감격으로 모악산을 보고 있노라니 그 옆으로 경각산, 상두산이 보이고“오봉이가 기를 갖고 나서면 두리봉에서도 나서고, 칠봉, 육봉에서도 나서라. 그러면 오봉이가 기를 갖고 춤을 추어라. 그런 후에 모든 산들이 기를 갖고 쑥쑥 나서서 춤을 추면 이제 우리가 손을 잡는다.”(증산도 도전 4:55) 하신 오봉산이 정겹게 펼쳐져 있다. 종성리에서부터 안내를 해준 노인은 순창 쪽이 앞이고 종성리쪽이 등이라고 말했다.
 
 고개를 돌려 남쪽을 보니 써래봉, 장군봉, 신선들이 바둑 둘 때 마시는 술을 놓는다는 소반바위, 큰지붕으로 불리는 회문봉과 천마봉이 나란히 보이고, 천마봉 너머 멀리 지리산 천황봉이 보였다. 지리산이 여기서 얼마인가? 이 때 종성리에서부터 안내해준 노인은 재미있는 얘기를 해 주었다.“ 솔봉에서 도통했다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여자관계가 복잡해서 천벌 받아 죽었다”며 그 사람이 살던 집터를 가리켰다. 노인의 얘기를 듣고 생각건대 진심견수(眞心堅守9:4)하여 착한 마음을 갖는 것이 도통에 앞서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솔봉 전망대에서 내려다보이는 개문터는 한말 승려 홍성문(洪成文, 일명 홍문대사)이 공부했던 책바위가 있는 곳인데, 나무에 가려 그 바위는 보일 듯 말 듯했다. 일전에 큰지붕에 올랐을 때 무등산 마이산 백련산 내장산 지리산 모악산 추월산이 손을 뻗으면 잡힐 듯이 가깝게 봤었던 기억이 있어, 빨리 큰지붕을 오르고 싶어서둘러 홍성문이 공부했다(증산도 도전5:396:2)는 개문터를 향해 출발했다. 마을 노인은 눈이 쌓여서 못 올라간다고 극구 말렸지만 육안으로 보이는 개문터 등산로에 눈이 다 녹아 보여 개문터를 향해 올라갔다. 중턱쯤 오르니 역시 노인의 말이 맞았다. 산 구석구석에 녹지 않은 눈들로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얼마 전 회문산 일대에 5일간 60cm 정도의 눈이 왔다고 했다. 여기까지 와서 개문터를 못 가다니 아쉬운 마음으로 차를 돌려 사실 재로 향했다.
 
 
 사실재
 사실재는 정읍 산내면 장금리 금곡마을에서 순창군 구림면 금창리 금상마을로 넘는 고갯길이다. 상제님과 두 성도께서 걸으셨던 이 고갯길은 비교적 높지 않은 곳이라서 눈이 많이 녹아 있었다. 그러나 햇빛이 닿지 않는 곳엔 눈과 얼음이 범벅이 되어 자동차가 연신 미끄러졌다.
 
 어렵게 어렵게 자동차는 고개 정상에 도착했다. 사실재 정상에서 동쪽으로 보이는 회문산 큰지붕 옆 열굴과 장군봉, 그리고 써래봉, 남쪽으로 보이는 세자봉과 여분산에도 따뜻한 햇빛이 고맙게 비치고 있었다.
 
 
 만일사와 태조 이성계
 사실재에서 금천리로 나오자 구림천 너머 옥새바위가 산위에 솟아 있어, 만일사(萬日寺)가 가까이 있음을 알려준다. 만일사는 현재 안정리 신안마을 동쪽산 시루봉과 돌곳봉아래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다. 만일사비(萬日寺碑)에 의하면 만일사는 백제 무왕 때(AD673) 창건한 사찰로 조선 초 이성계가 임금이 되기 전 무학대사(無學, 속성은 박씨, 당호는 계월헌溪月軒)에 의해 중건되었다가, 한국전쟁으로 완전 소실되었던 것을 1954(甲午)년 다시 세웠다고 한다.
 
 만일사라는 명칭은 무학대사가 이성계를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하고자 만일 동안 이곳에서 기도하였다는 데에서 유래했다. 그런데 원래 무학대사가 중건했다는 만일사는 현 사찰이 있는 곳에서 북쪽으로 약 200m 올라가 위치하고 있었으나, 1954년 현 건물을 중건할 때 현 위치로 옮겨 축조하였다고 한다. 원래의 만일사 건물이 있었던 자리에는 지금도 군데군데 주초석이 산재하여 있는데, 그곳은 현재 만일사의 위 대밭자리다.
 
 만일사 맞은 편 산에는 거북모양의 옥새바위가 있다. 무학대사는 이 옥새바위가 잘 보이는 곳에서 500년 왕업을 이어가는 조선 개국을 위해 만일 동안 기도를 했다고 전한다.
 
 무학대사가 100일 기도를 100번이나 올리면서 쌓고 쌓은 정성이 이성계가 조선이 개국하는 밑자리가 되었다는 일화이다.
 
 나는 상제님 천하사를 위해‘100일 기도라도 한번 제대로 했었는지’내 신앙을 다시 한 번 반성하게 되었다. 만일사에서 내 신앙을 스스로 재판해본 것이다. 10,000일은 27년이다. 무학대사는 27년을 기도하여 이성계를 조선을 개국하는 태조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홍문대사(洪文大師, 홍성문)가 27년 동안 회문산에서 공을 들인 이유가 무학대사의 만일 기도를 흉내낸 것이다. 서자출신의 홍성문은 27년이나 공을 들이고도 때와 사람을 잘못 만나 성공치 못하였다.(증산도 도전 5:396:2)
 
 정성이 부족한 나는 천지일월 사체 하나님을 만나 선천 억만 겁 인생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결정적 시간대 속에 서있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부족한 상제님 일꾼이지만 무학대사처럼 일심으로 기도하고 포교하여 반드시 천하사의 사명을 다할 것을 폐부에 새겨본다. (증산도 도전 5:396:2, 증산도 도전 11:410:2)
 
 
 순창고추장과 비빔밥
 


 무학대사가 이성계를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하고자 만일 동안 기도하였다는 만일사 비에는 고추장 진상 유래도 구전된다. 태조 이성계가 임금이 되기 전에 무학대사와 만일사에서 기도할 때, 하루는 산 안마을 김좌수 댁 초대를 받은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그 집에 가서 점심대접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산해진미가 다 올라와 있는 훌륭한 밥상이었는데 그중에서도 고추장맛이 일품이었다. 그로부터 이성계가 그 맛을 잊지 못하다가 조선을 창건하여 왕이 된 후 진상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비문은 비바람에 심하게 마모되었으나‘태조대왕’과‘무학’이란 글자는 알아볼 수 있다. 전란 때 3등분으로 파손된 것을 1978년 복원한 것으로 1658년 효종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경남 진주(晉州)에서는 비빔밥을 특이하게도 칠보화반(七寶花飯)이라 부른다. 여러가지 재료를 넣어서 만든, 보기에도 화려하고 맛있는 밥이라는 뜻이다. 맨밥인 백반에 대비되는 말인데 그 별칭이 참으로 흥미롭다. 비빔밥으로 유명한 곳은 평양 안동 진주 전주 등 수많은 곳이 있지만 전주(全州) 비빔밥이 가장 유명하다. 건지산(乾之山)과 곤지산(坤之山)이 있어 완전한 조건을 갖춘 땅이란 전주(全州). 전주하면 비빔밥이 대명사가 되었다.
 
 비빔밥에서는 고추장을 빼놓을 수 없는데, 고추장 하면 순창고추장이 으뜸이다. 맵싸 떨큼한 순창 고추장의 맛. 이 전주비빔밥과 순창고추장의 관계를 취해서 상제님께서 공사로 이화하신 것으로 보인다. 순창 고추장으로 비빔밥을 비벼서, 즉 순창 회문산 오선위기 기운으로 동서양을 비빔밥 비비듯이 비빌 테니 너희들은 태을주 숟가락으로 떠먹으라(증산도 도전 7:73:2)는 상제님의 속뜻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비벼서 곤남건북(坤南乾北) 정음정양(증산도 도전 4:109)의 세계일가 통일정권공사를 보신 것이다. 그 비벼지는 과정이 1, 2차 세계대전이며 마지막 문턱이 남북 상씨름이다.
 
 조화주 하나님이신 증산 상제님께서는 산하대운이 진귀차도(盡歸此道)(증산도 도전 4:19)로 그 지기를 취하고 풍속을 취하여 공사로 이화하여, 회문산 오선위기혈을 발음시켜 순창 고추장으로 온 세상을 비벼 세계일가 통일정권공사를 보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