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9천년역사

● 천경림을 비롯한 전불시대의 일곱 군데는 신라의 소도 터

천부경81자 2016. 5. 13. 17:57

천경림()은 신라 경주의 지명으로 흥륜사()가 창건되었다고 전하는 곳이다. 『삼국유사』 권3 흥법3 아도기라()조와 원종흥법염촉멸신()조에 천경림과 관련된 내용이 전한다. 먼저 『삼국유사』 아도기라조에 인용된 「아도본비()」에 따르면, 고구려사람 아도가 위()나라에 가서 승려가 된 뒤 19세 때 돌아와 어머니를 뵈니, 어머니가 지금부터 3천여 월이 지나면 계림()에 성왕()이 출현하여 불교를 크게 일으킬 것이라고 하면서 계림의 서울에 7곳의 옛 절터[]가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 중 첫 번째가 바로 금교() 동쪽의 천경림()이었다. 그 세주에 따르면 천경림은 곧 지금(고려)의 흥륜사()이며, 금교는 서천(西)의 다리를 말하는데 세간에서는 송교(, 솔다리)로 잘못 부르고 있다고 하였다. 「아도본비()」에는 이어서, 아도가 계림으로 들어온 이후의 상황도 전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아도는 미추왕() 2년(263) 계림()에 와서 왕성() 서쪽 마을에서 살면서 대궐에 가서 불교를 믿을 것을 청하였으나,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속림() 즉 일선현(, 경북 구미시 선산읍) 모록(祿)의 집으로 도망하여 숨었다고 한다. 3년이 되던 해에 아도가 궐에 들어가 병이 난 공주를 치료하자 왕이 이를 기뻐하면서 아도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였는데, 이때 아도는 천경림()에 절을 창건할 것을 청하였고, 이곳에 창건된 절이 곧 흥륜사()였다는 것이다.

즉, 아도기라조에 인용된 「아도본비」에서는 천경림이 두 번 등장하는데, 첫 번째는 경주에 있던 전불() 시대 칠처가람지허() 중 하나였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미추왕대 신라에 들어온 아도가 왕에게 청하여 이곳에 흥륜사를 세우도록 했다는 것이다. 다만 두 번째 나오는 천경림은 목판본에 “천경림()”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천경림()”의 오각인 듯하다.

또한 『삼국유사』 권3 흥법3 원종흥법염촉멸신()조에서는 「촉향분예불결사문()」을 인용하여 진흥대왕() 즉위 5년 갑자(, 544)에 대흥륜사()를 지었다고 하고, 그 세주에서 『국사()』와 향전()에 의하면 흥륜사는 법흥왕 14년 정미(, 527)에 터를 잡고 21년 을묘(, 535)에 천경림을 크게 벌채하여 처음으로 공사를 일으킨 것이라고 하였다. 절의 서까래와 대들보는 모두 그 숲에서 취했는데 쓰기에 넉넉했고, 계단의 초석이나 석감()도 모두 있었다고 한다.

한편 『해동고승전』 권1 아도()조와 법공()조에도 천경림이 나온다. 아도조의 내용은 박인량()의 『수이전()』을 인용한 것으로 그 내용은 『삼국유사』 아도기라조의 「아도본비」 기록과 같다. 법공조의 내용은 『삼국유사』 원종흥법염촉멸신조에 나오는 이차돈 설화와 비슷한데, 여기서는 염촉이 왕과 함께 불교를 일으키기로 약속하고 “천경림()에 절을 지으려 한다.”라고 사람들에게 전했다고 하며, 이후 법흥왕 21년(534) 천경림을 베어 정사()를 지으려고 땅을 고르다 주초석과 석감 및 계단 등을 얻으니 과연 이곳이 옛날 초제(, 사방에서 모여드는 수행승들이 머무는 객사)의 터였다고 기록하였다.

이 외 「도리사아도화상사적비()」(1639)에도 천경림과 관련된 내용이 전한다. 즉 소지왕(, 재위 479-500) 때 왕이 왕녀의 병 때문에 아도()를 만나 물으니, 아도가 말하기를 “저에게 천경림()을 주시면 곧 병이 나을 것입니다.”라고 하므로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는데, 모두들 말하기를 “이곳은 비보()로 전해온 바로서 만대에 이어온 것입니다. 위아래가 함께 받드는데 어찌 승려에게 주겠습니까?”라고 반대했다. 아도는 “상제()께서 저에게 명하였으니 이 땅은 허락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면서 물러서지 않았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모두 거짓으로 속이는 말이라 하여 믿을 수 없다고 하였으나, 오직 이차돈만이 불법 믿기를 청하였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와 『해동고승전』은 기록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천경림이 7곳의 옛 절터[] 중 하나이며,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가 세워진 곳이라는 내용은 공통적이다. 천경림을 비롯해 옛 절터로 언급된 7곳에 대해서는 일찍이 고대 신앙에 있어서 신성지역이었고 삼한지역에서 소도()로 불리던 지역들이었다고 지적된 바 있다.(이기백, 1978) 또한 이차돈 관련 설화를 고찰하는 가운데, 법흥왕과 이차돈, 군신 사이에 문제가 생겼던 것은 이차돈이 굳이 천경림에 절을 창건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이해하면서, 당시 천경림이 고유신앙의 성소()였기 때문에 이러한 마찰이 일어났던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하였다. 「도리사아도화상사적비」에서 천경림이 신라에서 비보()로 전해진 곳이라고 하였고, 또 천경림()을 “천경림()”이라고 기록하였으므로, 이곳에서 천신()에 대한 숭배가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최광식, 2007)

천경림의 위치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아도기라조에서 이곳이 곧 흥륜사라고 하고, 천경림은 금교() 동쪽에 있었으며 금교는 곧 서천(西)의 다리를 말한다고 하였다. 흥륜사의 위치에 대해서는 그동안 혼란이 있었지만 현재 경북 경주시 사정동 경주공업고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천경림은 이 근처에 있었던 숲을 이른다고 하겠다. 참고로 서천에 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輿)』 권21 경주부 산천조에서 부의 서쪽 4리에 있다고 하였는데, 흥륜사와의 관계에 따라 현재 경주공업고등학교 자리의 서편으로 보고 있다.(이근직, 2000)

[네이버 지식백과] 천경림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삼국유사 사전/박물지 시범개발), 2007., 한국콘텐츠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