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산도를 신앙하며 읽는 책]신의 역사 (A)history of God
제목: 신의 역사 (A)history of God
카렌 암스트롱| 배국원 역| 동연| 1999.02.01 | 734p |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개념의 하나는 신이다. 그 신의 개념을 통해 인간의 상상력은 끊임없이 자극 받았고 확장됐다. 유대교·기독교·이슬람의 역사를 통해본 신 관념의 변천사. 신 자체의 역사가 아님
신이라는 개념은 중요한건데 과학은 그에 관심을 안갖도록 가르쳤다
696 이 책은 신에 관한 연구서가 아니라 신 개념의 변천사를 소개하고 잇다
암스트롱이 다루고 있는 주제는 신이 아니라 신의 개념
698 분명한 사실은 신이라는 개념은 인간 삶에 있어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해온 개념중에 하나
30 과학문명은 물질적 육체적 세계에만 관심의 초점을 맟추라고 가르친다 그 결과 영적인 것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감각은 인간의 경험중에 가장 본질적인 요소였다
197 예수는 신적 영역인가 피조물의 영역인가. 아타나시우스는 예수를 신적영역에 두었고 아리우스는 그를 피조물의 영역에 두었다
사람들이 어떤 특정한 신 관념을 계속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이 자신들에게 유용하기 때문이지 그것이 과학적 또는 철학적으로 정당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믿음을 어떤 교리에 대한 지적 동의로 정의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미 살펴본 것처럼 <성서> 기자들은 신에 대한 믿음을 추상적 또는 형이상학적 신념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찬양한 것은 그의 교리적 정통성(즉 신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 견해의 수용)을 칭찬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사람이나 이상을 믿는다고 말할 때처럼 신을 '신뢰'했음을 칭찬한 것이다.
만약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세 종교의 탁월한 신앙가들로부터 하늘 위에서 세상으로 강림하는 신을 기다리는 대신 내 자신을 위하여 신에 대한 감각을 의식적으로 창조해야 한다는 것을 들었더라면, 나는 많은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유대교 랍비, 가톨릭 신부, 수피(이슬람 신비주의자)는 신을 -어떤 의미에서라도- '저편 어딘가에' 있는 실재라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고 했을 것이다. 그들은 내게 통상의 합리적인 방법으로 발견할 수 있는 객관적 사실로 신을 경험할 수 있다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을 것이다. 그들은 그토록 감동을 선사하는 시나 음악처럼 신이 창조적 상상력의 산물임을 일깨워주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인들은 시나이산의 신인 야웨가 유일한 신이라고 믿은 것이 아니라 이 계약을 통해 다른 모든 신을 거부하고 오직 야웨만을 경배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모세오경' 전체를 통하여 유일신론을 말하는 단 하나의 문장도 찾기 어렵다.
신은 인간의 사고를 뛰어넘어 그것을 아는 이들에게만 찾아오지, 사고를 통해 그것을 파악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에겐 오지 않는다네. 그것은 학식 있는 자에겐 감추어지고 순박한 이들에게만 알려지나니, 그것은 영생의 문을 여는 득도의 환희 속에서 알려지는 법일세.
예술작품을 창작하고 감상하기 위해 지성이 필요해도 예술감상이란 순전히 논리적이고 두뇌적 기능을 넘어서는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신의 역사에서 계속되는 주제로 등장하게 될 것이다.
불교도가 명상 가운에 희열이나 초월을 경험할 때 그들은 이 결과가 초자연적인 존재와의 접촉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상태는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누구든지 올바르게 살면서 요가의 기술을 배우기만 하면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붓다는 신에게 의지하기보다 스스로를 구원하도록 힘쓰라고 제자들에게 권했다.
종교는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인식에서 시작된다.
언제나 철학적이나 역사적 증명보다는 실효성이야말로 성공적인 종교의 특징이었다.
붓다는 개개인의 신학이나 신념, 가령 제의에 참가하는 일 등은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것들은 흥미롭지만 최종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곧 선한 삶이다. 만약 선한 삶을 살 수 있다면 불교도는 설령 그들이 논리적인 방법으로 이 진리를 표현하지 못하더라도 붓다의 다르마가 진리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이와 반대로 그리스인은 논리와 이성에 열광적인 관심을 가졌다. 플라톤은 말년에 영원한 형상과 이데아라는 자신의 학설을 철회하려고 했던 것 같지만, 이 학설은 많은 유일신론자가 신 개념을 표현하려고 할 때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이데아는 이성적 능력에 의해 파악될 수 있는 안정적이고 항구적인 실재다. (...) 신성한 것이 완전히 정적이라는 이미지는, 비록 그것이 계시의 신과는 전혀 공통점이 없을지라도 유대교인, 기됵교인, 무슬림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계시의 신은 끊임없이 활동적이고 혁신적이며, <성서>에서는 심지어 인간을 창조한 것을 후회하면서 대홍수를 통해 인류를 멸절시키도록 마음을 바꾸기도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야웨가 여신들과 경쟁했다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여성의 지위가 격하되기 시작했던 기축시대의 부정적인 특성을 반영한다. 그 이전 원시 사회에서는 여자가 남자보다 더 존경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전통적 종교에서 위대한 여신들이 누렸던 위엄은 곧 여성을 숭상했음을 반영한다. 그러나 도시의 출현은 여성적인 특성에 반해 군사적, 육체적 위력 등 더욱 남성적인 특성이 찬양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신의 개념이란 종종 인간 상상력의 연습이다.
어떤 공식적인 교리의 신의 본질적인 신비를 제한할 수밖에 없다.
기독교인이 로마 당국에게 핍박을 당할 때 그들의 죄명은 '무신론자'였는데, 이는 기독교인의 신 관념이 로마인의 정서를 심각하게 침해했기 때문이었다. 기독교인들이 전통적 신들을 존경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로마인들은 그들이 국가를 위태롭게 하고 견고하지 못한 사회질서를 전복시킬지 모른다고 염려했다. 기독교는 문명이 달성해온 바를 무시하는 야만적 교리로 보였던 것이다.
모든 종교는 개념적 틀을 초월하는 불가해한 실재를 지향하고 있으며, 인간의 일상 언어는 신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데 제한적이며 심지어 혼돈을 야기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영의 눈으로 종교적 진리를 '바라보는' 체험 없이는 신에 관한 올바른 이해와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 성서는 문자대로의 의미 외에 인간의 언어로는 뚜렷히 밝힐 수 없는 영적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러한 종교적 진리의 비의성에 관한 문제는 인간 언어의 한계를 넘어선 실재에 대한 질문들이 적절치 못함을 지적한 붓다의 가르침에도 나타난다. 비의적 종교 진리는 때때로 인간의 내면에서 우러나와 창조되는 것이므로, 인간은 관조를 통한 내면 성찰의 노력 없이는 결코 그것을 깨달을 수 없다. 심오한 비의적 종교 진리를 언어로 표현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베토벤의 음악을 언어로 설명하려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다. 바실리우스가 말한 것처럼 그것은 오직 예배의식의 상징적 형태들 그리고 보다 더 적절하게는 침묵에 의해 암시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서구 기독교는 진리의 공개적 가르침인 케뤼그마를 강조하는 언어 지향적인 종교로 발전해 왔으며, 결국 신을 이해하는 데 여러 중대한 문제를 야기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이 아담의 죄로 인해 모든 인류에게 영원한 파멸의 운명을 내렸다고 믿었으며, 이러한 믿음은 그 이후 서구인의 세계관의 핵심을 이루었다. 그의 원죄교리의 기본요지는 아담의 원죄가 색욕에 의해 더럽혀진 성행위를 통해 모든 인류 후손에게 이어진다는 것이었다. 유대교인도 동방 정교회 기독교인도 아담의 타락을 이러한 파멸적인 빛으로 보지 않았다. 또 뒤에 무슬림도 이 원죄라는 희망 없는 신학을 채택하지 않았다. 오직 서방 기독교회에서만 독특하게 나타난 원죄 교리는 냉혹한 모습의 신을 강조한 테르툴리아누스에 의해 처음 제시되었고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확고한 신학적 체계를 갖추어 서구인의 세계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서구인에게 한 가지 곤혹스런 유산을 남겨주었다. 그는 서구인에게 인간의 근원적 결점을 강조하는 기독교 신앙을 가르침으로써 인간 소외의 원인을 제공했다. 그의 원죄론에서 비롯된 인간 소외 현상은 성 이해의 격하, 특히 여성에 대한 억압적 이해를 통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본래 기독교는 여성을 긍정적으로 생각한 종교였으나 아우구스티누스를 통해 서구 문화에 여성 혐오의 뿌리가 생겼다.
서방 기독교 신학은 신에 관한 인간의 언어적 해석과 표현에만 집착했다. 서방 기독교 신학자 중에는 신을 인간의 사고 개념에 상응하는 존재인양 설명하는 이들도 있고, 또 다른 신학자들은 자신들의 신 개념을 신의 속성으로 규정하고 정당화함으로써 심각한 우상 숭배의 페해를 낳았다. 그러나 동방 기독교회의 신은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신비의 신으로 늘 남아있었으며, 삼위일체 또한 인간의 교리적 신 이해가 절대적이지 못함을 그들에게 상기시켜주는 역할을 했다.
꾸란은 신에 관한 신학적 이론에 대해 강한 회의를 보인다. 특히 꾸란은 신에 관한 신학적 이론을 아무도 깨닫거나 입증할 수 없는 것에 관한 자의적인 추정의 산물로 치부한다.
오늘날 대다수 서구인은 객관적 정밀성에 대한 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지만, 종교의 '감추어진' 차원을 탐구하고 있던 이스마일파의 바티니(신적 지혜의 탐구에 헌신하는 자)는 현대 서구인과는 정반대의 문제에 심혈을 기울였다. 시인이나 화가처럼 그들은 논리와 거의 무관한 상징을 사용함으로써 인간의 감각이나 이성적 개념보다 더 심오한 차원의 문제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들은 침묵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인간의 언어와 충만한 실재인 신 개념 사이에 존재하는 질적 차이를 깨닫는다.
알 가잘리는 이성보다 우월한 능력인 '예언자적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일부 있음을 지적하면서, 그러한 능력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이 그것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예언자적 정신이 존재하는 것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것은 마치 음치가 음악을 감상할 수 없다고 그것의 존재를 환상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인간은 이성의 추론 능력과 상상력을 통해 신에 관한 무언가를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신에 관한 최고의 깨달음은 신이 특별히 부여한 능력을 소요한 예언자나 신비주의자들에 의해 얻어질 수 있다. 이것은 엘리트주의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다른 여러 전통의 신비주의자들도 禪이나 불교의 명상 같은 훈련이 요구되는 직관적인 그리고 감수성이 풍부한 자질은 詩作 능력에 비견할 만한 특별한 선물이라고 주장해왔다.
이슬람의 경우처럼, 올바른 행동 곧 정행에 대조되는 올바른 이론 곧 정설의 개념은 유대교의 종교 경험에 낯선 것이다. 이처럼 이븐 루쉬드와 마이모니데스의 교리 신조의 제시는 이론적 강론보다는 실천적 체험을 더 강조하는 이슬람과 유대교에 적절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종교에 대한 지식층의 합리주의적 접근이 신앙을 특정 교리 신념에 고정시키는 교조주의를 초래할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동방 기독교인은 '은총의 신학'이나 '가족의 신학'의 개념이 용어 표현부터 모순점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개념이란 신의 본질을 깨닫는 데 이차적인 것이라 생각하며 이론적인 논의와 정의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서방 기독교인은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신의 속성에 관한 개념적 정의의 문제에 동방 기독교인과는 달리 점차 더 많은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어 서방교회는 구원이 어떻게 일어나는가와 성찬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관한 이견의 차이 때문에 종교 전쟁까지 불사하였으며 결국 가톨릭과 개신교로 분열되었다. 서방 기독교인은 끊임없이 동방 기독교인에게 신학적 논쟁의 포문을 열었으나, 그때마다 동방 기독교인은 논쟁을 회피하거나 여러 주장을 절충해 적당히 묶어 응답하였다. 동방 기독교인은 인간의 개념과 논리를 초월하는 신에 관한 논의의 도구로서 합리주의가 적절하지 않다고 믿었다. 또 오히려 신앙을 해치는 위험을 초래한다고 생각하였다. 철학은 인간 정신을 대변하는 한낱 장광설에 불과하며, 오로지 종교적 신비 체험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신에 대해 그저 침묵을 지켜야 할 뿐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과격한 주지주의가 신앙에 해악이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신을 인간의 이기적 목표를 달성하려는 자의적 해석의 대상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종교경험도 이성의 비판적 검증을 거쳐야 한다.
인격적 신 이해에는 커다란 문제가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인격적 신이 인간의 필요조건, 두려움과 소망 같은 감정을 반영하는 인간 상상의 투영에 불과한 하나의 우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때때로 인간은 자신이 느끼고 행하는 것처럼 신도 느끼고 행하며, 또한 신이 인간의 편견과 아집을 부정하기보다 용잉하는 것으로 추정하곤 한다. 그리고 신이 재앙을 막지 못하고 오히려 조장하는 것처럼 보일 때 인간은 신을 냉혹하고 잔인한 존재로 이해하며, 심지어 재앙이 신의 뜻이라고까지 믿음으로써 근본적으로 인정할 수 없는 것마저 인정하기도 했다. 또한 인격적 신 개념은 신을 남성적 측면에서만 이해함으로써 여성을 억압하는 부적절한 성 관습을 정당화시켰다. 이처럼 인격적 신은 인간이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겸허하게 초월적 세계를 지향하게 하기보다 냉혹하고 잔인하며 편협한 인간적 과오를 정당화시키는 위험을 품고 있다. 모든 종교가 공텅적으로 내세우는 사랑의 가르침과는 정반대로 인격적 신은 인간이 타자를 판단하고 정죄하며 소외시키는 구실이 되기도 했다. 그러무르 인격적 신 개념은 종교의 본질을 표현하지 못하며 단지 종교 발전의 한 단계를 나타낼 뿐이다. 세계의 모든 종교는 이러한 인격적 신 개념이 갖고 있는 위험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인간의 사고 범주를 넘어선 초월적 신 개념을 추구해왔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것처럼, 단테는 '신비적 상상'이 단순히 세속 세계에 대한 감각적 이해로부터 비롯된 표상들을 결합하는 것이 아니며, 부분적으로 신으로부터의 영감에 기인한다고 주장하였다.
인간이 보는 것은 개인에게 구체적인 모습으로 계시하는 신의 개별적 특성이지 신 자체의 본질이 아니다. 그러므로 신에 관한 인간의 개별적 이해는 필연적으로 인간이 처한 종교 전통의 이해를 받는다. 바로 이러한 신 이해를 신비주의자들은 숨겨진 신의 본질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상징적 신 이해라고 규정하면서, 모든 다양한 형태의 종교들을 제각기 타당성을 갖는 신의 현현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교리 중심의 종교인들이 자신의 교리를 지키기 위해 피비린내나는 유혈 분쟁을 일삼은 것과는 달리, 신비주의자들은 다양한 표현 속에 나타나는 하나의 신에 대한 신앙을 통해 종교적 통일성을 지향한다.
서유럽의 기독교회는 14세기 들어 신비주의 신앙을 본격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하였으나, 유대교나 이슬람과는 달리 끝내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다. 영국과 독일, 서유럽의 저지대 국가에서 태동한 신비주의 신앙은 16세기 개신교 종교개혁 세력에 의해 비성서적 영성 표현으로 비판을 받았고, 아빌라의 성 테레사 같은 탁월한 신비주의자들고 로마 가톨릭 교회의 반종교개혁 정책의 일환으로 실시된 종교 재판의 위협을 받아 위축되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신비주의 신 이해를 목하 수용 중이던 서구 유럽 기독교회에 종교 개혁의 물결이 다시 합리주의적 신 이해를 재등장시켰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최대의 인본주의자 프랑체스코 페트라르카는 "신학은 인간 이성에 무언가를 '증명'해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꿰뚫어 심금을 울리는, 신에 관한 시를 쓰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사탄을 절대적으로 부정하는 기독교의 악마 이해는 사실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예를 들어 <꾸란>은 사탄이 최후의 심판 때 구원받을 수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일부 수피는 사탄이 다른 천사들보다 신을 더 사랑한 것과, 신이 그로 하여금 인간에게 절할 것을 명했으나, 그것은 오직 신에게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이유로 복종을 거부한 것이 그의 죄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에게 사탄은 근본적으로 악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나 서구 기독교회에서 사탄은 통제 불가능한 악의 화신이자 거대한 성기를 가진 성적 탐욕의 괴물로 이해되었다. 노만 쿤이 그의 책 <유럽의 내적 악마들>에서 지적한 대로, 사악한 성적 괴물로서의 사탄은 단지 인간의 숨겨진 두려움과 불안뿐 아니라, 당시 억압적인 종교가 표방한 냉혹한 신 이해에 대한 무의식적 반발감의 소산이었다. (...) 어둠의 미사는 너무 냉혹하고 두려워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신 대신에 악마를 숭배하는 소름끼칠 정도로 두렵지만 도착적인 만족감을 주는 의식이 되었던 것이다.
전통적인 기독교 신조들은 두터와 칼뱅 같은 종교개혁자들도 의문을 제기할 수 없을 만큼 기독교인의 경험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었다.
루터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제시한 것과 같은 논리적 증명에 의해 설명되는 신은 이교도 철학자의 신이라고 주장하면서 신 존재 증명의 가능성에 회의를 품었다. 그는 인간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말하면서 신 개념의 정당성을 거부했다. (...) 그는 인간이 신에 관해 알 수 있는 것은 죄된 인간에게 위협적일 뿐인 신의 권능과 지혜, 그리고 정의이기 때문에 이성만으로 신에게 접근하는 것은 위험하고 절망적인 결과를 낳는다고 경고했다.
단순한 신앙 원리를 표방한 종교개혁이 아이러니컬하게 기존 교리들을 대체하려는 여러 종파적 움직임에 의해 새로운 교리들을 양산함으로써 오히려 더 복잡한 교리상의 혼동을 초래
일단 성서가 상징적 의미가 아니라 문자적 의미로 해석되는 올바른 신 이해는 불가능하다. 세계에서 현실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은 초월적 상징의 신을 냉혹한 전제적 폭군으로 만다는 것과 같은 신 이해의 모순을 초래한다. 칼뱅주의자의 예정설은 바로 문자적 성서 해석에 근거한 인격적 신 이해가 낳을 수 있는 문제점을 대표적으로 보여주었다.
당시에 현대적 의미의 무신론은 불가능했다. (...) 당시 모든 사람의 생활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완전히 종교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 만일 누군가 종교의 본질과 신 존재에 객관적 의문을 제기하는 비범성을 발휘한다고 할지라도 그는 어느 곳에서도 그를 지지하는 철학과 학문을 발견할 수 없었다. (...) 철학적, 학문적 지지를 받지 못한 채 신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일고의 가치조차 없는 개인적 괴팍함의 일시적 표현으로 여겨질 뿐이었다. (...) 다시 말해, 18세기 말까지 유럽에서 신 존재를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의 지동설은 이스마일파나 수피, 카발리스트, 헤쉬카스트들에게 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서 속 문자의 절대성을 강조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에게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 이러한 문자적 성서 이해 주장은 새로운 과학 발전의 도전을 이겨내지 못했으며, 결국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신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상실하게 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한 마디로 기독교 신학자들은 다가오는 변화의 물결에 대비하는 적절한 종교적 해결책을 전혀 제시하지 못했다. 종교개혁과 이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대한 맹목적 집착으로 그들은 신을 하나의 객관적인 실체로 만들어 버렸으며, 궁극적으로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에 신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는 새로운 의미의 '무신론자'를 양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17세기로 접어들면서 기독교 신학자들은 더욱 더 완고하게 이성적 추론의 근거 위에서 신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으며, 오늘날까지 적지 않은 사람에게 위세를 떨치고 있다. 부정할 수 없는 새로운 과학 이론들의 등장으로 인해 그들이 주장하는 신 이해는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다. 일상적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고, 오직 기도와 명상의 상상적 수련을 통해서만 발견할 수 있는 신의 절대적 신비를 상징적으로 이해하는 대신, 신은 단지 인간 삶의 여러 일상적 실재 중 하나로 전락했다. 과학 문명이 주도하기 시작한 새로운 세계로 서구 유럽이 접어들 무렵에 나타난 레시우스의 주장을 통해, 당시 기독교 신학자들이 장래의 무신론자들에게 신은 아무런 종교적 가치가 없으며, 믿음과 소망보다는 실의와 두려움을 줄 뿐이라고 공격할 수 있는 총탄들을 미리 예비해주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파스칼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합리적 논증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과 결단의 문제였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그동안 신 존재 논증에 매달려오던 서구의 유일신론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여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서유럽에서 신비주의는 종교개혁 때 일어난 교리 논쟁으로 인해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수세기 동안, 신의 종교의 각각에서 유일신론자들은 신이 일반적 경험 대상과는 다른 차원의 존재라고 주장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 기독교인들은 마치 신이 어떤 객관적 존재인 양 말했고, 자연과학적 방법을 통해 신을 다른 존재들과 별 차이 없는 하나의 객관적 실체로서 증명하고자 시도했다.
유대교인, 무슬림, 동방 기독교인은 서구 기독교회의 인격적 절대 초월의 신 개념이 신의 신비적 실체를 드러내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그들은 모두 신은 인간이 파악할 수 없는 형태로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신을 최고 존재로 묘사하기보다 無로 규정했다. 그러나 서구 기독교인들은 상상적 차원의 신 개념보다는 현실 세계를 주관하는 하나의 구체적인 존재로서의 신 개념을 중시했다. 따라서 계몽주의 시대 이후 서구인들이 그러한 신 개념을 인간에게 비열한 굴종과 무가치한 의존만을 강요하는 비인간적인 신 개념으로 이해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유대인, 무슬림, 동방 기독교인과는 달리, 서구 기독교인은 신을 인간 삶의 외부로 밀어내 전제 군주의 모습으로 이해함으로써 신을 우상화햇을 뿐 아니라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경시하는 오류를 낳았다. 그들은 아우구스티누스 이래 인간의 죄와 악, 투쟁과 고통만을 강조했다.
프로이트는 현명하게도 종교를 어떠한 방법으로든 강제적으로 억압하는 것은 파괴적인 결과를 낳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사실 성적 욕구처럼 종교적 신앙도 인간 생활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주는 주요한 요소이기에, 그것에 대한 억압은 성적 욕구의 억압 못지않은 폭발적이고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4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천지간에 가득 찬 것이 신(神)이니
5 풀잎 하나라도 신이 떠나면 마르고 흙 바른 벽이라도 신이 떠나면 무너지고, 손톱 밑에 가시 하나 드는 것도 신이 들어서 되느니라.
6 신이 없는 곳이 없고, 신이 하지 않는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라.
(증산도 도전 道典 4:6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