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족보전문도서관 나주김씨 내용
나주김씨(羅州金氏)
시조 김운발(金雲發)은 신라 경순왕의 둘째 아들인 김굉의 맏아들이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의 기록에 의하면 김굉은 신라(新羅)가 망하자 해인사로 들어가 삭발을 하고 법명을 범공(梵空)으로 하여 불가로 귀의하였는데, 그가 입산하기 전에 고려에서 두 아들을 예우하여 첫째 아들 김운발은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나주군에 봉하고, 둘째 아들 김우발(金雨發)은 경주군(慶州君)에 봉했다고 한다.
김운발이 나주군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본관을 나주로 하였다.
- 묘소는 개성시 북쪽 오룡산에 있다.
김운발의 아들 김중륜(金重輪)과 김인륜(金仁輪)이 고려에서 각각 시중(侍中)과 원윤(源尹)에 올랐으며, 증손자 김원상(金源相)은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역임하여 명성을 떨쳤다.
판윤(判尹) 김우해(金宇海)의 아들 김광(金光)은 보문각(寶文閣)의 정2품 벼슬인 대제학(大提學)을 지냈고, 후손 김수연(金守淵)은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역임하였다.
1326년(충숙왕 13년) 문과에 급제한 김대경(金臺卿)은 벼슬이 대제학에 이르렀으며, 문장(文章)이 당세에 뛰어나 동문선(東文選 :신라 때부터 조선 숙종 때까지의 시문을 모은 책)에 그의 시가 올랐고, 한때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함께 나주 안로현(安老縣)에서 유배생활을 겪기도 하였다.
조선 시대에 와서는 공조참의(工曹參議) 김규(金珪)와 형조참의(刑曹參議) 김경근(金敬近)이 유명했으며, 김경석(金景錫)은 중종 때 무과에 급제하고, 명종 때 호남 지방에 왜구가 침입하자 방어사(防禦使)로서 5촌간인 김적(金適)과 함께 이를 격퇴시켰다.
그외 길주 목사(吉州牧使) 김진(金鎭), 풍천부사(豊川府使) 김수신(金守信), 도총관(都摠管) 김충수(金忠秀)가 유명했는데, 특히 김충수는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고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올랐으며, 정유재란 때는 부인과 함께 장렬하게 순절하여 나라에서 그의 고향인 공주에 정문(旌門)을 세우게 하였다.
전라 관찰사(觀察使)를 지낸 김장송(金長松), 남원부사(南原府使)를 지낸 김몽동(金夢東)과 김난익(金蘭益), 현감(縣監)을 지낸 김희징(金禧澄)과 김원동, 이등공신(原從二等功臣) 김언호(金彦浩)와 함께 명성을 떨쳐 가문을 빛냈다
[본관지] 전라남도 나주시
[ 연락처 ] 02)213-0741
나주(羅州)는 전라남도의 중서부(中西部)에 위치한 고장으로 백제(百濟) 시대에 발라(發羅)였고,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 제35대 왕, 재위기간 : 742 ∼ 765) 때는 금산(錦山)으로 고쳤으며,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본거지로 삼았다가 후에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여기를 점령하고 나주(羅州)로 개칭하였다. 나주 김씨(羅州金氏)의 시조(始祖) 김운발(金雲發)은 경순왕 (敬順王)의 둘째아들인 김 굉의 맏아들이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인 굉은 신라(新羅)가 망하자 가야산(伽倻産) 해인사(海印寺)로 들어가 축발(祝髮)을 하고 법명(法名)을 범공(梵空)으로 하여 불가로 귀의(歸依)하였는데, 그가 입산(入山)하기 전에 고려조(高麗朝)에서 두 아들을 예우(禮遇)하여 장자(長子) 운발(雲發)은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나주군(羅州君)에 봉하고, 차자(次子) 우발(雨發)은 경주군(慶州君)에 봉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운발(雲發)을 시조(始祖)로 하고 나주(羅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누대에 걸쳐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하여 명문(名門)의 긍지를 심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운발(雲發)의 아들 중륜(重輪)과 인륜(仁輪)이 고려에서 각각 시중(侍中)과 원윤(源尹)에 올랐으며, 증손(曾孫) 원상(源相)은 예의 판서(禮儀判書)를 역임하여 명성을 떨쳤다. 한편 판윤(判尹) 우해(宇海)의 아들 광(光)은 보문각(寶文閣)의 정2품 벼슬인 대제학(大提學)을 지냈고, 후손 수연(守淵) 은 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역임하였다. 서기 1326년(충숙왕 13) 문과에 급제한 대경(臺卿)은 벼슬이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으며, 문장(文章)이 당세에 뛰어나 [동문선(東文選 :신라 때부터 조선 숙종 때까지의 시문을 모은 책)]에 그의 시(詩)가 올랐고, 한때 목은(牧隱) 이 색(李 穡)과 함께 나주(羅州) 안로현(安老縣)에서 유배생활을 겪기도 하였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공조참의(工曹參議) 규(珪)와 형조 참의(刑曹參議) 경근(敬近)이 유명했으며, 부총제 정준(廷儁)의 현손(玄孫) 경석(景錫)은 중종(中宗) 때 무과에 급제하고, 명종(明宗) 때 호남(湖南) 지방에 왜구가 침입하자 방어사(防禦使)로서 종질(從姪)인 적(適)과 함께 이를 격퇴시켰다. 그외 길주 목사(吉州牧使) 진(鎭), 풍천 부사(豊川府使) 수신(守信), 도총관(都摠管) 충수(忠秀)가 유명했는데, 특히 충수는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고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올랐으며, 정유재란 때는 부인과 함께 장렬하게 순절하여 나라에서 그의 고향인 공주(公州)에 정문(旌門)을 세우게 하였다. 전라 관찰사(全羅觀察使) 장송(長松)도 남원 부사(南原府使) 몽동(夢東)·난익(蘭益), 현감(縣監) 희징(禧澄), 원동 이등공신(原從二等功臣) 언호(彦浩)와 함께 명성을 떨쳐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나주 김씨(羅州金氏)는 남한(南韓)에 총 9,780가구, 41,25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