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입도조와 분묘
濟州의 入島祖와 墳墓
洪 淳 晩
(제주문화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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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1. 제주의 原住族
2. 人類의 이동과 제주도
3. 제주의 人脈
4. 제주의 入島祖
5. 入島祖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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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주의 原住族
제주도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을 살펴보면 구석기인(舊石器人)이 살았던 것을 볼 수 있다. 제주도의 선사유적 가운데 구석기시대의 유적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북제주군 애월읍 어음리 어음동굴 유적(於音洞窟 遺蹟)이다. 지난 1973년에 발견된 이 동굴에서는 황곰을 비롯하여 사슴․노루․멧돼지 등 많은 동물들의 뼈화석과 석기류 목탄 등 선사인이 동굴생활을 하였던 많은 유물들이 수집되었다. 여기에 대한 추정 연대는 학자들에 따라 각각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정영화(鄭永和․嶺南大) 교수는 7만 년 전, 김원용(金元龍․서울大) 교수는 6만 년 전, 에사카(江坂輝彌 ․일본 慶應大) 교수는 3만 년 전으로 보고 있다. 어쨌든 구석기시대의 유적임에는 틀림이 없다.
또 서귀포시 천지연 바위그늘유적 등 구석기 시대의 바위그늘유적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금년 2월에는 남제주군 대정읍 상모리와 안덕면 사계리 해안 응회암층에서 5만 년 전으로 추정되는 구석기인과 동물들의 발자국 화석이 발견되어 화제에 오르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 사람과 동물들의 발자국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한 연대추정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좀 더 신중한 검증의 이루어진 뒤에야 사실이 밝혀질 것으로 본다.
이 발자국 화석을 차치하고라도 제주도에 구석기인이 살았던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구석기시대에 제주도에 사람이 살았다고 해서 그 구석기인을 오늘의 제주인의 선조로 보기는 어렵다. 그때는 제주도가 섬이 아니고 연륙(連陸)상태이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문화의 고리를 연결시킬 수도 없다.
제주도가 섬이 된 것은 제4기 홍적세(洪積世)의 빙하시대가 끝나고 해수면이 상승한 충적세(沖積世)때로 보아야 할 것이며 그것은 약 1만 년 전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제주인의 조상은 섬이 되고 나서부터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그렇게 본다면 신석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고 청동기 시대를 거쳐 역사 시대로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제주인은 원 제주족(原濟州族)이던 역사시대 이후의 제주인(濟州人)이던 간에 분명한 것은 어디선가 들어온 도래인(渡來人)이라는 사실이다. 다만 구별이 되어야 할 것은 선사시대냐, 고대냐, 중세냐, 근세냐 하는 전후 시대의 구분이 있어야 할 것이며 또 어디서 온 누구냐 하는 문제가 있다.
그동안 필자는 여기에 관해서 실로 많은 이야기를 들어왔다. 걸핏하면 “북방이다” “남방이다” 하는 계통설과 함께 거기에 “○○족” “○○족”하는 종족설(種族說) 등 많은 이야기를 듣고 있다. 몇몇 학자들의 예외를 제외한다면 마치 제주족이 어느 날 갑자기 어디서 들어와 그것으로 끝나고만 것 같은 단순 논리들이다.
그 두드러진 몇 가지를 들어보겠다.
부여족(夫餘族)=李丙燾. 金泰能. 金仁顥.
한족(韓族)+ 일본족(日本族)=鳥居龍藏.
세망족(말레이반도)=坪井九馬三
해신족(海神族)=岩本善文
선비족(鮮卑族)=白鳥庫吉
몽골족(蒙古族)=泉 靖一
이같은 견해와는 달리 다종족설을 주장한 경우도 볼 수 있다.
아이누족을 비롯한 다 종족설=崔南善
운남(雲南), 해남도(海南島) 필리핀 몽골. 일본=石宙明
한족(韓族)+한족(漢族)→변한족(弁韓族)=李昌煥
안남(安南) 복건(福建) 필리핀(比島)=大原利武
제주족이 어느 한 계통에서 들어온 어떤 종족이다 하는 단순논리는 이제 설득력을 지닐 수가 없다. 더구나 제주도와 같은 지정학적 위치로 볼 때 이미 고대 국가 때부터 교통로 상의 길목이며 십자로에 놓여 있는 점을 고려할 때 말이 되지 않는다.
여기서 필자는 <제주도의 문화사관>에서 최남선(崔南善)이 제기한 말을 상기시키면서 필자의 생각을 대신하려고 한다.
세계의 어느 민족을 물론하고 단일혈통은 없다. 심하고 덜 심한 차이는 있을망정 어떤 민족이던 혼혈로 성립돼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조선도 내륙본토는 비교적 단순한 편에 속하지만 제주도의 경우는 매우 복잡하며 퍽 많은 종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
2. 人類의 이동과 제주도
여기서 우리는 인류가 어떻게 발달하고 어떻게 이동하여 왔는가를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류가 급격한 발달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부터 라고 할 수 있다. 농사를 지으면서 많은 도구들이 개발되었고 그것은 인간의 위력을 발휘하는 전기가 되었다. 의식주문제가 해결되어 인구의 팽창을 초래하게 되었고 정착생활을 하다보니 토지의 한계를 느끼고 이동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씨족집단이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농업집단이었기 때문에 물 좋고 비옥한 땅으로의 이동이 진행되었다. 다시 말하면 문화이동이었다고 말 할 수 있고, 철기문화를 지닌 강력한 집단이었기 때문에 정복집단으로 군림하였다. 반면에 힘없는 원주족들은 쫓겨나거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기원전부터 한반도에 들어와 정착한 한족(韓族)의 전신들, 다시 말하면 동이족(東夷族), 예맥족(濊貊族), 부여족(夫餘族), 퉁구스어족 등이 모두 정복집단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농업문화는 인류의 큰 이동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제주도도 바로 그런 정복집단이 이동 또는 정복대상 후보지가 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한마디로 아예 문화이동 대상에는 오를 수 없는 곳이 제주도였다. 그것은 제주도가 작은 섬이었다는 이유만도 아니고 문화기반 자체가 농업생산에는 전연 부적합한 땅이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제주도는 3기말 풀라이오세 때부터 시작하여 4기 홍적세까지 화산활동에 의해서 형성된 화산체라고 할 수 있다. 표층은 온통 현무암층이 덮고 있다. 풍화작용에 의해서 표토가 생겼다고 하지만 여전히 암반층으로 농사에 적합한 토양층은 형성될 수 없었다. 게다가 모든 강수는 지하로 빠져버리고 지상에는 표류수(表流水)를 지탱할 수 가 없다. 게다가 연중 계절풍과 태풍의 위협 속에 있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땅이 제주도라고 할 수 있다.
누가 이런 땅에 종족을 거느리고 찾아오겠는가. 따라서 제주도에는 처음부터 농사를 지으려고, 또 잘 살려고 씨족이나 가족을 거느리고 들어온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제주도에 들어와 발붙인 사람들은 누구인가. 약간의 표착족(漂着族)들을 제외한다면 거의가 유망족(流亡族)들이었다고 할 것이다. 국외 망명(亡命)이 필요했던 집단, 권력으로부터의 피난이 필요했던 사람들이 모두 제주도로 흘러들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고대 때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거듭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나라가 멸망했을 때, 왕조(王朝)가 바뀌었을 때, 권력의 변동, 사화와 당쟁으로부터의 피난 등 많은 사연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약간의 예외를 제외한다면 그들은 대부분 정치적 사연을 지닌 유망인들이었다고 할 것이다.
3. 제주의 人脈
제주도의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고대로부터 중세에 걸쳐 살아온 제주인들 보다는 근세 조선시대 이후에 들어온 제주인이 대종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지난 2000년 11월 제주도가 조사한 성씨통계를 보면 고대로부터 살아온 토박이로 볼 수 있는 고․양․부 3성의 경우 20,438 가구에 66,549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가구, 인구 다 같이 전체의 13%를 차지하고 있다.
중세 때 들어온 성씨 가운데 벌족을 이룰 수 있었던 성씨는 남평 문씨 (南平文氏)와 광산 김씨(光山金氏)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이들 두 성씨의 경우 10,624가구에 34,335명으로 나타나 가구, 인구 모두 전체의 6.7%에 해당한다. 이들 고대와 중세 이전의 성씨를 합치면 31,062가구에 100,884명으로 가구, 인구 다 같이 전체 인구의 19.7%를 점유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밖에 중세 때 20~30성이 더 들어온 것으로 보이지만 거의 벌족을 이룬 성씨라고 할 수는 없다. 따라서 그들을 포함시킬 경우라도 20여%에 그치며 적어도 70여%가 조선시대 이후에 들어온 유망족이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볼만한 점은 고․양․부 3성 외에도 제주(濟州)를 본(本)으로 하는 성씨들이 기록문헌 등에 나타나고 있는 사실이다.
만성통보(萬姓統譜)에는 고․양․부 3성과 좌(左․大靜) 초(肖) 등 5성밖에 나타나 있지 않지만 문헌비고(文獻備考)에 보면 무려 37성이나 제주를 본으로 하는 성씨가 나타나고 있다.
고(高)․양(梁)․부(夫)․김(金)․박(朴)․정(鄭)․최(崔)․유(柳)․홍(洪)․한(韓)․오(吳)․안(安)․허(許)․임(林)․우(禹)․라(羅)․노(盧)․변(卞)․백(白)․전(全)․강(康)․엄(嚴)․현(玄)․하(河)․지(池)․진(陳)․주(朱)․반(潘)․함(咸)․양(楊)․마(馬)․표(表)․피(皮)․천(千)․양(良)․배(裵)․좌(左) 등이 그들 성이다.
우리나라의 20대 대성 가운데는 이(李)․강(姜)․문(文)․현(玄)․송(宋)․윤(尹)․장(張)․조(趙) 등 불과 몇 성이 빠져 있는 정도라고 하겠다. 제주를 본으로 했던 성씨가 이처럼 많았는데 최근에는 이들 성씨가 대폭 감소된 현상을 볼 수 있다. 2000년도에 제주도가 조사한 성씨분포를 보면 제주를 본으로 하는 성씨는 다음과 같이 22개 성으로 줄어들고 있다.
고(高)․양(梁)․부(夫)․강(姜)․현(玄)․좌(左)․오(吳)․김(金)․한(韓)․문(文)․홍(洪)․변(邊)․진(秦)․송(宋)․정(鄭)․장(張)․강(康)․허(許)․박(朴)․구(具)․최(崔)․황(黃) 등이다.
이 가운데 벌족을 이룬 고․양․부 3성을 제외한다면 100가구가 넘은 성은 강(姜)․현(玄) 두 성뿐이며 인구 100명이 넘는 성씨는 좌(左)․오(吳)․김(金) 3성에 지나지 않는다. 고․양․부 3성을 제외하고 나머지 19개성 모두를 합쳐도 731가구 2408명으로 각각 전체의 0.4%에 지나지 않는다. <별표>
여기서 우리는 제주를 본으로 하는 성이 왜 이렇게 많았는가 하는 문제와 아울러 왜 이런 성이 최근에 와서는 급격하게 감소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제주도의 역사를 돌아보면 고대 때부터 제주도는 중국과는 여러 모로 관계가 있었다고 할 수 있고 특히 13세기에서 14세기에 걸려 100년 동안을 원제국의 직속령이 되어 직접 지배를 받았다. 문헌비고를 보면 이때 제주도에는 조(趙)․이(李)․석(石)․초(肖)․강(姜)․정(鄭)․장(張)․송(宋)․주(周)․진(秦) 등 10성이 귀화한 것으로 되어 있고 그들이 본은 대원(大元)이었다.
그 뒤 원이 멸망하고 명(明)나라 초기에도 양왕(梁王) 가속 등 여러 사람들이 들어오는데 이때 귀화한 성이 원(元)․양(梁)․안(安)․강(姜)․대(對) 등 5성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들의 본은 운남(雲南)이었다. 그런데 지금 운남이나 대원 본은 찾아 볼 수가 없다.
따라서 이들 성 가운데 일부는 제주를 본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들 성 가운데는 제주를 본으로 한 성이 아예 없는 것이 8성이나 나타난다. 다시 말하면 제주에 본을 둔 대부분의 성씨들은 귀화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누구일까. 필자는 이들이 유망족임은 물론이며 그런 가운데도 자신을 사장(死藏)시키려는 사연을 지닌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제주도의 주류를 이룬 인맥은 바로 이런 사연을 지닌 유망족들에 의해서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또 그들이 들어오는 큰 흐름은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왕조가 건국하는 정권변동기를 전후해서 일어나고 있다.
그 물꼬를 크게 틀어 논 사람들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선비정신을 실천하고 이성계(李成桂)의 새 왕조를 거부한 고려유신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4. 제주의 入島祖
고양부 3성과 같이 고대부터 살아온 토박이를 제외하고 제주도에서 벌족을 이룬 성씨들의 입도조가 들어온 시기를 보면 거의가 14세기 말에서 15세기에 걸치는 정권변동기라고 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주요 성씨, 주요 인물들의 입도 배경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김해 김씨(金海金氏) 입도조 김만희 金萬希(景興)가 제주도에 들어온 것은 1392년(태조 1) 조선왕조가 개국한 직후로 알려져 있다. 중시조 김유신(金庾信)의 38세 직계손이었고 자가 여운(汝雲) 호가 창재(暢齋)였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 좌찬성사(左贊成事)를 거쳐 삼중대광 도첨의 좌정승 (三重大匡 都僉議 左政丞)까지 오른 사람이었다. 그는 태조의 등용을 거부하고 제주에 낙향 애월읍 곽지(郭支) 마을에 은거하여 일생을 마쳤다.
경주 김씨(慶州金氏) 입도조 김검룡(金儉龍)이 입도한 것은 1403년 (태종 3)으로 알려져 있고 성산읍 오조리 (城山邑 吾照里)에 거주한 것으로 되어 있다. 김겅용은 아버지가 익화군 김인찬 (益和君 金仁贊)으로 조선개국 일등공신이며 의정부좌찬성(左贊成)의 요직에 있었으므로 그의 입도에 관해서는 여러 모로 의문에 쌓여 있다. 그는 훈련원 도감(都監)으로 있다가 1398년(태조 7)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사임한 것으로 보아 무자비한 권력쟁탈전에 실망하고 낙향한 것으로 보인다.
광산 김씨(光山金氏) 입도조 김윤조(金胤祖)는 삼별초(三別抄)의 난 때 영암부사(靈岩府使)로 있다가 제주에 들어와 전사한 김수(金須)부사의 징손이다. 아버지는 문간공 김광재 (文簡公 金光載)였으며 형이 김흥조(金興祖)였다.
1368년(공민왕17) 신돈(辛旽)이 집권하여 국정을 어지럽게 하자 김흥조는 그를 제거할 모의를 하다가 도리어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김윤조는 형의 참화를 보고 곧 개경을 떠나 멀리 제주도로 낙향하였다. 그는 입도 후 구좌읍 김녕(金寧)에 은거하다가 만년에 한동(漢東) 감남굴에 옮겨 살았다.
나주 김씨(羅州金氏) 입도조 김인충(金仁忠)은 고려 말에 강화진 좌령랑장(左領郞將)을 역임한 사람이다. 그는 14세기말(永樂年間1403~1428)에 입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의 입도 동기에 대해서는 자세한 내용이 밝혀져 있지 않다. 이 문중에서는 뒷날 1555년(명종 10) 7월 제주성에 왜구 1000여명이 침공해왔을 때 특공대를 지휘하여 그들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고 대첩을 거둔 건공장군(建功將軍) 김성조(金成祖)같은 사람이 배출되기도 한다.
연안 김씨(延安金氏) 입도조 김안보(金安寶)는 한림학사(翰林學士)로 고려가 멸망하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자 15세기 초 관직을 버리고 제주에 낙향했다. 처음 제주성 일도리에 은거하였는데 아들 복수(福壽)때 거로동 (禾北二洞)으로 옮겨 마을을 설촌하고 고마장(古馬場)에 목장을 설치하여 뒷날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청주 한씨(淸州韓氏) 입도조 한천(韓蕆)은 예문관 대제학 (藝文館 大提學)을 지낸 고려의 명망높은 학자였다. 그는 1392년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 왕조를 세우자 조선왕조의 조신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제주도에 유망했다. 그는 표선면 가시리(加時里)에 은거, 정치를 외면한 채 오직 교학에만 힘썼다.
양천 허씨(陽川許氏) 입도조 허손(許愻)은 고려가 망하자 자진하여 순국한 대제학 허흠(許欽)의 아들로 그의 형 허증(許懲)은 두문동(杜門洞) 고려절신(高麗節臣) 72인의 한 사람이었다. 그도 밀직제학(密直提學)을 지낸 고려유신으로 1392년 조선왕조가 들어서자 신왕조를 거부하고 제주도에 낙향 구좌읍 종달리(終達里)에 은거 일생을 마쳤으며 3세손부터는 정의현 돈원(敦原․表善面 細花里)으로 옮겨 살았다.
신천 강씨(信川康氏) 입도조 강영(康永)은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오빠가 되며 전라감사를 지냈다. 1398년 (태조7) 이방원(李芳遠․뒤의 太宗)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외조카 방번(芳蕃) 방석(芳碩)등이 몰살당하자 왕자들의 골육상잔에 환멸을 느끼고 제주도로 유망했다. 그는 조천읍 함덕리(咸德里)에 은거 일생을 마쳤다.
남양 홍씨(南陽洪氏) 입도조 홍윤강(洪允康)은 문하시중(門下侍中) 문정공 홍언박(文正公 洪彦博)의 손자로 사재감(司宰監)을 지냈다. 그는 공민왕 시해사건. 고려 충신들의 피화(被禍) 왕자의 난 등 계속되는 무자비한 피의 숙청을 보면서 1402년(태종 2) 권력에서 멀리 떨어진 제주에 낙행했다.
경주 이씨(慶州李氏) 익재공파 입도조 이미(李美)는 고려 조정에서 교리(敎理)를 지낸 사람으로 14세기 말 새 왕조의 출사를 거부하고 제주에 낙향했다. 그 뒤 1401년(태종 1) 그의 형 이신(李伸)이 제주도안무사가 되어 도임, 임기를 마치자 함께 돌아가기를 권유하였지만 끝내 거부하고 제주에서 교육에 힘쓰다가 일생을 마쳤다.
원주 변씨(原州邊氏) 입도조 변세청(邊世淸)은 고려 말에 삼도도원수(三道都元帥)를 지낸 변안열(邊安烈)의 손자로 중랑장(中郞將)을 역임했다. 그가 제주에 입도한 것은 15세기 초로 볼 수 있으며 그 직접 동기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고려가 멸망한 것을 실망하고 제주에 낙향한 것으로 생각된다.
연주현씨(延州玄氏) 입도조 현사경(玄思敬)이 제주에 들어온 것은 15세기 초 조선왕조가 들어선 직후로 되어 있다. 그는 조선이 개국한 뒤 돈녕부 도정(都正)을 역임하고 제주목사로 도임한 것으로 문중에 알려져 왔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대로 낙향한 것으로 되어 있다.
순흥 안씨(順興安氏) 입도조 안득경(安得敬)이 제주에 들어온 것은 1398년(태조 7) 왕자의 난 직후로 알려져 있다. 수의부위(修義副尉) 등 관직에 몸담았던 그는 왕자들의 처참한 왕권투쟁을 보고 크게 실망 제주에 낙향 애월읍 어도리(於道里)에 은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에서 본 것은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왕조가 들어서는 15세기를 전후한 격동의 혼란기에 제주에 낙향한 입도조들이라고 할 수 있다.
제주에는 이들 보다 먼저 고려시대의 정치변동에 따라 들어온 사람들이 있었고 또 그 뒤로는 정세의 변동에 따라 사화가 일어나고 옥사가 터질 때마다 꼬리를 물로 들어와 제주의 입도조들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들 하나하나를 지적해 나갈 수는 없다. 다만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그들이 어느 시대에 들어왔던 간에 그들이 들어오게 된 배경에는 한결같이 깊은 사연이 있었고 그러기에 그들은 늘 세상을 등지고 자신을 숨기며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 같은 사실을 오늘에 증언해주고 있는 것이 바로 그들이 남긴 무덤이라고 할 수 있다.
5. 入島祖들의 무덤
오늘 제주도내의 입도조들 무덤을 보면 약간의 예외를 빼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버젓이 드러나게 전해져 온 무덤들은 보기가 매우 드물다. 지금까지도 아예 입도조묘를 찾지 못하고 있는 문중들이 많고 어쩌다가 홀연히 또는 예상되었던 곳에서 어떤 단서를 재발견한 예들도 볼 수 있다.
사당 성역화사업을 추진하면서 한천(韓蕆)의 무덤을 찾아낸 것이나 기건(奇虔)목사가 쓴 지석(誌石)을 발굴하여 강영(康永)의 무덤을 밝혀낸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것이다.
남양홍씨(南陽洪氏)의 경우 입도조부터 4대까지 도내에는 무덤이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족보 등에는 입도조 홍윤강(洪允康)이 손자까지 데리고 상경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최근의 조사로 상경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결국 무덤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사실은 비단 남양 홍씨만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조선 왕조의 건국을 전후한 정권변동기에 들어온 입도조들 가운데 무덤이 처음부터 제대로 보전된 경우를 보면 구좌음 종달리 김검용(金儉龍)의 무덤, 구좌읍 서김녕리 화산악(花山岳) 김윤조(金胤祖)의 무덤. 영실 삼장굴(三藏堀) 이미(李美)의 무덤. 제주시 노형동 함박동(咸朴洞) 변세청(邊世淸)의 무덤. 등이라고 할 수 있다.
표선면 가시리에 한천(韓蕆)의 묘가 새로 이장 조성되었고 조천읍 함덕리에서 강영(康永)의 묘가 밝혀졌고 제주시 화북동 진만이들에 김안보(金安寶)의 무덤이 이장된 것들을 볼 수 있고 그 밖의 묘들은 여전히 실묘 상태로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입도조나 웃대의 묘가 없는데 대해서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것을 정리해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유망(流亡)과 은폐(隱蔽)
(2) 실전(失傳)
(3) 후손의 관리불실
(4) 표석의 멸실
(5) 매장법의 미정착
(6) 출육(出陸)
출육의 경우 대체로 위장일 가능성이 크지만 그렇다고 출육이 전연 없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몸을 숨기고 은둔할 때 한 곳에만 정착하는 것보다 이전할 필요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제주도까지 흘러온 유망인이 자손을 버리고 출육하는 일은 좀처럼 생각할 수 없고, 있었다 하더라도 극히 드문 일이었다고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장법(葬法)을 보면 선사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양식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가운데 조선시대에 가장 보편적이며 주종을 이룬 장법은 토장제였다고 할 수 있다.
김원룡(金元龍) 교수의 <한국의 고분>을 보면 토장은 이미 선사시대부터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제도적으로 널리 정착한 것은 우리나라에 주자학(朱子學)이 들어온 이후의 일이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입도조들의 들어오던 15세기를 전후한 때는 그 초기단계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에도 제주에는 풍장(風葬)풍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할 수 있지만 입도조들의 경우는 모두 지식층에 속한 인물들이었으므로 그런 경우와는 다르다고 할 것이다.
표석이 멸실은 제주에서는 충분히 고려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오석(烏石)이나 애석(艾石)과는 달리 제주석(濟州石)으로 비를 새겼을 때 제주의 매서운 비바람으로 그 수명이 오래 갈 수가 없다.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백년쯤 되면 마모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2 백년쯤 되면 알아보기가 어렵게 된다. 그리하여 오랜 비의 경우 빗돌이 남아 있더라도 그 기능을 상실하고 만다.
실전이나 후손들의 관리 소홀로 실묘(失墓)하는 예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할 것이다. 제주도와 같은 재앙의 섬에서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여간 고달픈 일이 아니었다고 할 것이며 후손들 가운데 뜻하지 않는 사고나 절손 등으로 묘를 돌보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고 할 것이다. 비가 없는 무덤이라면 이런 일이 생길 때 그대로 실묘하는 결과가 될 것은 뻔한 일이다.
그러나 그 어떤 이유보다도 입도조 묘를 찾을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입도조 스스로가 자신을 숨기고 드러내지 않으려고 한데 있었다고 할 것이다.
제주도에 낙향한 입도조들은 거의가 세상을 등진 유망인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유망한 배경은 거의가 정치권력에 저항한 때문이었고 그들의 박해로부터 자신이나 자손을 보전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할 것이다.
입도조 가운데는 제주에 들어온 뒤 이름을 고쳐서 은둔한 예들을 볼 수 있고 자손들에게도 관직에 나서지 말 것을 물론 자기 신분을 감춰 살도록 당부한 사례들을 볼 수 있다. 이 같은 처세가 죽은 뒤까지도 비를 세우는 것은 물론 알릴 필요조차 없도록 했다고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