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를 계승한 대진국(밝해=발해)은 어떠한 나라였는가?
고구려를 계승한 대진국(밝해=발해)은 어떠한 나라였는가?
환국과 신시배달국,그리고 단군조선과 부여와 고구려이래로 우리 민족의 주 활동 무대였던 만주대륙은 대진국 멸망 후 우리 역사 속에서 점차 사라져 갔다. 그 땅뿐 아니라 그 얼과 인물들까지도…. 우리 역사에서 잊혀진 제국, 대진국에 대해 알아 보자.
서기 668년 9월 21일 당나라에 의해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고구려의 평양성(장안성)이 함락되었다. 당시 서압록하(지금의 요하)를 지키던 고구려 장군 대중상은 패망한 고구려 유민을 모아 동쪽 동모산에 이르렀다.
나라 이름을 ‘후고구려’라 하고 연호를 ‘고구려의 영광을 거듭한다’는 뜻으로 ‘중광重光’이라 하였다. 고구려의 옛 땅 회복을 자신의 천명이라 여겼던 대중상이 699년 5월 붕어한 뒤, 태자였던 대조영이 뒤를 잇게 된다. 기존 사서에서는 대중상의 붕어 전 해인 698년에 대진국이 건국된 것으로 전부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환단고기』 「대진국본기」에 의하면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 그 해 대중상이 대진국의 전신인 후고구려를 건국한 것으로 나온다.
제위에 오른 대조영은 홀한성(지금의 상경 용천부)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는 대진(大震), 연호를 천통(天統, 하늘의 법통을 계승한다)이라 하였다. 대조영은 군사 10만을 양성하였는데, 말갈 장수 걸사비우와 거란 장수 이진영과 손을 잡고 이해고가 이끄는 당나라 정예군을 천문령에서 격파하였다.
당시 당은 고구려의 전 영역이 아닌 평양지역과 요동 일대만을 점령하고 있었다. 즉 나머지 고구려의 전 영역에서는 활발하게 고구려의 부활을 위한 움직임들이 있었고 그 결정체가 바로 대진국의 건국인 것이다. 669년부터 국제정세는 당에게 불리하게 진행되었다. 티벳지역의 토번이 당나라 서쪽 국경을 기습하고 돌궐이 재건되는 등 새로 건국된 대진국에게는 별 어려움 없이 국력을 축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건국 후 대조영은 돌궐과 신라에 사신을 보내 통교하여 고구려의 부활을 선언하고 고토 회복에 나서게 된다. 대진국의 본격적인 진출은 2대 광종 무황제 때 대장 장문휴의 등주 기습에서 시작된다. 견디다 못한 당나라 현종은 대조영에게 ‘발해군왕’이라는 이름을 내리며 평화협정을 맺는다. 현재 지나국은 당나라 헌종이 발해군왕이라 칭했다 하여 대진국을 당나라의 지방정권 취급을 하고 있다. 명백히 대진국의 황후묘가 발견된 이상 지나국은 더 이상 황제국가였던 대진국을 당나라의 지방정권으로 비하매도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지나국 스스로가 진실을 감추고 날조하는 수준이하의 저질국가임을 드러낼 뿐이기 때문이다.
대진국은 대중상이 처음에 나라이름을 ‘후고구려’라 했듯이 고구려의 국통을 이은 나라다. 『속일본기』에 의하면 대진국의 광종 무황제 대흠무가 일본에 국서를 전할 때 자신을 ‘고려국왕’이라 칭한 사실이 나온다. 그리고 일본국이 대진국에 보내는 회답서 또한 대진국을 ‘고려’라 하였으며 대진국의 사신들도 ‘견고려사(遣高麗使)’라 하였다.
아울러 『속일본기』는 ‘고려의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의 풍속을 계승하였다(復高麗之舊居 有扶餘之遺俗)’ 라는 구절로서 대진국의 유래를 밝히고 있다. 중국의 사서에도 도처에 대진국과 고구려가 일치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대진국의 황제들 역시 단군조선,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천손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3신 하느님께 천제를 올렸으며, [천부경][삼일신고][참전계경] 등 민족경전들을 황제들이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강론하였다. 고구려 건축물과 동일한 형태를 한 대진국의 온돌의 존재와 형태는 대진국이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입증하는 중요한 증거로 꼽히고 있다.
대진국은 발전을 거듭하여 문물이 크게 융성하였고 영토도 고구려의 전영역과 지금의 연해주, 한반도 북부를 아우르게 되었다. 이는 고구려 전성기의 1.5배~2배, 후신라의 4~5배, 한반도의 2~3배의 강역으로 칭제건원과 상제님에 대한 천제의식으로 천자국임을 내외에 공표하고 천하의 중심 고구려의 부활임을 내세웠다. 대진국과 전쟁에서 패한 당나라는 물론이고 일본, 신라, 거란 등이 두려워하며 복종하였고 조공을 받으며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흠송 받았다.
고구려의 국통을 이어 광대한 제국을 건설했던 대진국은 9세기 후반 통치력이 크게 약화된 것으로 보인다. 거란 태조 야율아보기의 흥기는 대진국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다. 야율아보기는 정복군주로서 중국대륙으로의 진출을 목표로 삼았다. 유목민족이 갑자기 성장하게 되면 국가유지 비용충당을 위해 지나국을 공략하는 것은 상례였고, 후방의 안전을 위해 우리 민족과는 늘 숙명적인 대결을 벌여야 했다. 925년 겨울, 야율아보기는 대진국 원정을 단행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정월 대진국 수도 홀한성이 함락되었다.
대진국의 쇠퇴와 멸망 원인은 기록의 미비로 잘 알 수가 없다. 지금까지는 『요사(遼史)』의 기록에 따라 내분에 의해 자멸했다고 말해왔다. 하지만 요사는 전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에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그리고 1990년 일본의 마치다 히로시 교수는 「백두산 화산 폭발과 그 환경적 영향」이란 논문에서 대진국의 멸망이 백두산의 화산폭발 때문이라는 가설을 내세우기도 했다.
그런데 대진국의 마지막 왕이 전통적인 군사력을 유지하면서 방비체계를 확고히 하였고, 주변국가와의 교류를 지속적으로 추진하면서 압박해 오는 거란군의 침입에 대응을 하였던 것이 밝혀진 만큼 대진국의 멸망에 대해 좀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대조영이 세운 대진국은 마고국.환국.배달국과 단군조선을 계승한 해모수의 북부여(BCE 239년 건국)와 북부여를 계승한 고추모의 고구려(부여에서 나와 BCE 37년 건국)에서 왕건의 고려, 그리고 지금의 대한민국 KOREA를 잇는 연결고리다.
그런데도 대진국이 우리 역사에서 다른 왕조에 비해 대접받지 못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첫째 이유로는 대진국의 국통을 이은 고려(918~1392)가 대진국사를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유득공이 『발해고』 서문에서 삼국시대에 이어 남북국시대를 처음 기술함으로써 대진국 역사를 기술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유득공은 “고려가 발해사를 편찬하지 않았으니…. 북쪽은 대씨가 차지했으니 곧 발해다. 이것이 남북국이니 남북국사가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았으니 잘못된 일이다” 라 말했다.
『삼국사기』에서도 대진국의 건국 및 자세한 역사기술은 빠져있다. 『삼국유사』에도 말갈 발해전에서 간단히 언급하는 정도이다. 그래서 두만강 북쪽과 압록강 서쪽이 누구의 땅인지 알지 못하게 됐다. 많지 않은 대진국 관련 기록과 그 기록의 애매함으로 대진국의 정체성이 왜곡되어 온 것이다.
둘째 이유로는 역사를 되살리고 보존해야 할 우리들의 무관심이다. 우리 역사에 대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가장 잘 알아야 함에도 그 관심은 너무나 일천하다. 후손들의 애정과 관심을 받지 못하는 역사는 역사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기 마련이다.
셋째 이유로는 마땅히 임진강이북으로 고구려를 계승한 대진국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신라가 3국을 통일한 것인양 착각하여 대진국을 제외시켜 버린 민족사 인식때문이다. 고로 분명히 할 일이다. 신라는 3국을 통일한 적이 결코 없으며, 백제본국이 존재했던 한반도 남3한에 해당하는 지역을 당나라의 힘을 빌어 3한을 통합했을 뿐이다.
서기 7세기 지나대륙을 통일한 수와 당의 연이은 침입을 격퇴하여 천하의 중심을 선언한 고구려. 그러나 고구려는 그 후 20년 만에 너무나 허망하게 멸망하고 말았다. 패망한 고구려 유민의 망국의 한을 딛고, 역사의 황무지 위에 고구려의 부흥을 꿈꾸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칭송을 받은 대진국이 건설되었다. 하지만 그 대진국이 우리 역사에서조차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거기다 지금은 지나국의 손에 의해 철저하게 왜곡되고 있다.
이제라도 우리는 감춰진 역사의 진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관심을 가져 지나국의 동북공정으로 인해 소멸될 위기에 있는 우리의 고대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 대조영이 꿈꾸었던 고구려 부흥의 에너지가 우리 내부에도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비젼은 마땅히 마고.환인.환웅.환검.해모수.고추모의 3신 광명 하느님 신앙과 홍익정신으로 동아시아를 KOREA중심의 공존시대를 열었던 고구려여야 하는 것이다.
[환단고기 -대진국 본기 제7 大震國 本紀 第七]
<<조대기>>에서 말한다. 개화 27년 9월 21일 평양성 함락 때 진국장군 대중상은 서압록하(지금의 서요하)를 지키다가 변을 듣고 마침내 무리를 이끌고 험한 길을 달려 개원을 지나는데, 소문을 듣고 따르겠다고 원하는 자 8000인이 재빨리 모여들어, 동쪽으로 동모산에 이르러 웅거했다. 성벽을 굳게 하여 스스로 보존하고 나라를 후고구려라 칭하고 기원을 중광이라 하였다. 이르는 곳마다 격문을 전하니 원근의 뭇 성들은 귀속해 오는 곳이 많았다. 다만 옛 땅을 회복함을 자기의 임무로 삼다가 중광 32년 5월 대중상은 붕어하였다. 묘호를 세조라 하고 시호를 진숙열황제라 하다.
태자 대조영은 부사를 따라 영주 계성으로부터 무리를 이끌고 당도하여 제위에 오르다. 홀한성을 쌓아 도읍을 옮기고 군 10만을 모집하여 위세를 크게 떨치었다. 곧 계책을 세우고 제도를 세워 당나라에 대항하여 적에 복수할것을 스스로 맹세했다.
말갈의 장수 걸사비우와 거란의 장수 이진영과 손을 잡고 병력을 연합하여 크게 당나라 장군 이해고를 천문령에서 격파했다. 뭇 장수들을 나누어 군현을 두고 지키며 유망민을 초무하고 정착을 널리 보호하고 크게 백성의 신망을 얻어 모든 기강을 새롭게 했다. 국호를 정하여 대진이라 하고 연호를 천통이라 하고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니,땅은 6,00리가 개척되었다. 천통 21년 봄 대안전에서 돌아 가시니 묘호를 태조리하고 시호를 성무고황제라 하다. 태자 무예가 즉위하다. 개원하여 인안이라 하고 서쪽으로 거란과 경계를 정하니 오주목의 동쪽 십리에서 황수를 굽어 본다. 이해 개마 구다 흑수의 여러 나라가 모두 신하 될 것을 청하며 공물을 바쳤다. 또 대장 장문휴를 보내 자사 위준을 죽이고, 등주와 동래를 취하여 성읍으로 삼다. 당나라 왕 융기가 노하여 병사를 보냈으나 이기지 못했다.
이듬해 수비장수 연충린이 말갈병과 함께 요서의 대산의 남쪽에서 크게 당나라 군사를 격파하였다. 당나라는 비밀히 신라와 약속하여 동남의 여러 군과 읍을 급습하여 천정군에 이르다. 제는 조서를 내려 보병과 기병 2만을 보내 이를 격파 케하다. 이 때 신라와 당의 군사는 동사자가 아주 많았다. 이에 추격하여 하서의 이하에 이르러 국계를 정하니, 지금 강릉의 북이하가 그것이다. 해주 암연현은 동쪽으로 신라와 접했는데 암연은 지금의 옹진이다. 이로부터 신라는 해마다 입공하고 임진강 이북의 제성은 모조리 우리에게 속했다. 다시 이듬해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하여 침입하였으나 결국은 아무 공도 없이 물러 났다.
인안 16년 구다 개마 흑수의 여러 나라들이 항복해 오니, 이들을 성읍으로 삼았다. 이듬해 송막 12성을 쌓고 또 요서 6성을 쌓다. 마침내 5경 60주 1군 38현을 소유하니 그 원폭이 9,000리였다. 성대한 나라였다. 이 해 당나라 신라 및 왜도 나란히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니 천하는 해동성국이라고 칭송했다.
이에 발해사람 셋이면 한마리 호랑이를 당한다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 때의 군민은 화락하고 역사를 논하며 의를 즐겼다. 오곡은 풍성하고 사해는 안락했다. 대진육덕의 노래라는 것이 있어 이러한 대진국을 찬미했다.
다음해 3월 안민현에 감로가 내리다. 예관은 계장을 올려 하의할 것을 청하여 이에 따랐다. 이달 16일 3신일체의 상제(하느님)를 서압록하의 강변에서 제사하다. 서압록하는 고리의 옛 나라의 땅이다. 19년 제께서 붕어하시니 묘호를 광종이라 하고 시호는 무황제라 했다. 태자 흠무가 즉위했다. 개원하여 대흥이라 하고 도읍을 동경의 용원부로부터 상경의 용천부로 옮기다. 이듬해엔 태학을 세우고 천경신고를 가르치며 한단고사를 강하고, 또 문사에 명하여 국사 25권을 편찬케 하니, 문치는 예악을 일으키고 인간의 홍익하는 교화는 이로써 만방에 미치게 되었다.
※각주: 1949년 지나국 길림성 돈화현 현성 근처의 우정산 고분에서 문황제의 둘째 딸인 정혜공주의 묘비가 출토 되었다. 그 비문 2행은 ‘대흥’으로 시작된다. 대흥을 연호로 적는 유일한 기록이 태백일사.
대흥 45년 치정의 절도사 이정기는 군사를 이끌고 당나라 군대에 항거하니 제는 장수를 보내 싸움을 도웁게 하더라. 이정기는 고구려 사람이요, 평로에서 태어났다. 22(?),년 장수들은 군사 이희일을 쫓고 정기를 즉위시켰으나 죽었고, 아들인 납이 아버지의 백성들을 통솔하였다. 56년 납도 죽고 아들 사고가 그 자리를 이었다. 사고가 죽었을 때 가인들은 상을 발하지 않고 은밀히 사람을 보내 사도를 맞아 고를 모셨다. 대흥 57년 황제께서 붕어하시니 묘호를 세종 시호를 광성문황제라하다. 국인은 그의 족제 원의를 즉위시켰으나 성품이 포악하여 나라를 다스릴 수 없었다.
갑술년 국인은 이를 폐하고 선제의 손자 화흥을 맞아 즉위시키고 개원하여 중흥이라 하였다. 이듬해에 붕어하시니 묘호를 인종 시호를 성황제라 하였다. 황숙인 승린이 즉위하니 이를 목종 강황제라 한다. 의종 정황제 원유, 강종 희황제 언희, 철종 간황제 명충을 지나 선황제 인수에 이르다. 타고난 모습이 영명하시고 덕은 신과 같고 재능은 문무를 겸비하였으니 곧 태조의 풍채가 있었다.
개마의 남북에 자리잡고 땅의 넓이 9,000리 영토는 크게 열리고 문치는 널리 가득 퍼졌다. 위론 국도로부터 밑으론 주현에 이르기 까지 모두 학식 있고 구서 오계를 아침저녁으로 읽고 익혔다. 춘추에 공적을 생각하여 뭇사람이 의논하여 인재를 추천하며 공물을 바쳤다. 사람들은 이미 힘을 길렀고 집집마다 모조리 나라에 쓰임을 기다리니, 이로부터 국세는 부강하어 나라의 안팎이 모두 편안하게 즐거웠으니 절로 도둑질이나 모사의 폐단이 없어졌다. 당나라,왜,신라,거란 할것 없이 두려워하며 복종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천하만방은 이로써 성인흥취의 해동성국이라고 흠송하였다.
5대가 바뀌었을 때 야율은 빈번하게 몇차례나 싸움을 일으켜 왔으나 종내 굴복 시키지는 못했고 뒤에 장종 화황제 이진, 순종 안황제 건황, 명종 경황제 현석을 지나 애제인 청태에 이르러 거란에게 멸망되니 세조로부터 15세를 전하여 259년을 누렸다.
목종은 개원하여 정력이라 했고 의종은 영덕 강종은 주작 철종은 태시 성종은 건흥이라 히고, 장종은 함화 순종은 대정 명종은 천복 애제는 청태라고 개원하였다.
대진국의 남경인 남해부는 본래 남옥저의 옛 땅이다. 지금의 해성현이 그것이다. 서경인 압록부는 본래 고리국korea이요, 지금의 임황이다. 지금의 서요하는 곧 옛날의 서압록하였다. 고로 옛 책에서의 안민현은 동쪽에 있으며, 그 서는 임황현이다. 임황은 뒤에 요나라의 상경 임황부가 된다. 곧 옛날의 서안평이다.
정주는 의려국이 도읍한 땅이다. 선비 모용괴에게 패하여 핍박 받을 것을 걱정하다가 재빨리 생각하기를 "나의 혼이 아직도 오히려 망하지 않았오니 어디간들 이루지 못 할 것인가?"’라고 했다. 은밀하게 아들 부(의)라에게 맡겨서 백랑산을 넘어 밤에 해구를 건너게 하였더니 따르는 자 수천이라, 마침내 바다를 건너 왜인을 평정하고 왕이 되었다. 자칭 3신의 부명에 응한다고 하여 군신으로 하여금 하례의 의식을 올리게 하였다.
혹은 말한다. ‘의려왕은 선비 때문에 패하여 도망쳐서 바다에 든 후 돌아 오지 않았다. 자제들은 도망쳐서 북옥저를 보존하고 이듬해 아들 의라가 즉위하니 이 때부터 모용괴가 또다시 국인을 침략하였다. 이에 의라는 무리 수천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마침내 왜인을 평정해서 왕이 되다.’라고.
일본은 옛날에 이국에 있었나니 역시 이세라고도 한다. 왜와 이웃하였다. 이도국은 축자에 있으며 곧 일향국이다. 여기서부터 동쪽은 왜에 속하며 그 남쪽은 안라에 속한다. 안라는 본래 홀본(고구려) 사람이다.
북쪽에 아소산이 있다. 안라는 뒤에 임나(대마도)에 들어 갔는데 고구려와 이미 친교를 맺었다. 말로국의 남쪽을 대우국이라 한다. 시라군이 있었으니 본래 남옥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남만 도침미 완하 비자체의 무리는 모두 조공했다. 남만은 구려의 유종으로서 산월로부터 온 자들이다. 비자체는 변진의 비사벌 사람의 취락이다. 완하는 고구려 속노들이다. 때에 왜인들은 갈리어서 산도에 근거하여 살며 각각 100여국이 있었다. 그가운데 구야한국이 가장 크니 본래 구야본국 사람이 다스렸던 곳이다. 해상 선박은 모두가 종도에 모여 교역했으니 오 위 만 월의 무리들 모두 통상했다. 처음 바다를 건너 천여리에 대마국에 이르는데 사방이 400여리쯤 된다. 또 다시 바다를 건너 1천여리쯤 가면 일기국에 이르는데 여기는 사방 300여리쯤이다. 본래 사이기국이라 했다. 여러 작은 섬들이 모두 조공했다. 또 바다를 건너면 말로국에 이른다. 본래 읍루 사람이 모이는 곳이다. 동남쪽 육지로 500리 쯤 가면 이도국에 이른다. 곧 반여언의 옛읍이다.
<<신당서>>에서는, "발해는 본래 속말갈로서 고구려에 붙어 있던 자로 성은 대씨이다. 걸걸중상이라는 자가 말갈의 추장 걸사비우 및 고구려의 여중과 함께 동쪽으로 도망하여 요수를 건너 태백산의 동북을 확보하여 오루하에 근거 하였다. 중상이 죽고 아들 조영은 나머지 무리를 이끌고 도망쳐 갔다. 곧 비우의 무리를 합쳐 거칠고 멀다는 것을 믿고 곧 건국하여 스스로 진국왕이라 이름하고 부여 옥저 변한 해북의 해북의 뭇 나라를 모조리 얻었다."고 하였다.
사씨는 말하기를 "걸걸중상은 패망의 나머지 무리를 데리고 험한 곳에 달려가 스스로 보전하였다."’라고 한다. 태왕이 빈을 떠난 것과 같이 고왕 대조영은 창업의 뜻을 갖고 가시밭을 갈아 다시 나라의 기초를 이룸은 구천이 월나라를 세움과 같다. 대저 폭원은 이미 설만하니, 곧 문덕을 가지고 이를 닦고 제도를 제정하여 관작을 세우고 군현을 늘어 놓아 대국에 저항하였다. 나라의 영역은 5,000리에 이르고 역사는 300년에 이르다. 당시 사방에 대진국을 넘볼 자가 없었고 역시 크게 성했던 나라라 할만하다.
고려 현종 원문대왕의 20년 거란의 동경장군 대연림은 태조 고황제의 7세손이다. 유수부마 소효원과 남양공주를 사로잡고, 호부사 한소윤 등을 죽이고 즉위하여 요를 세운다고 하고 천경이라고 개원했다. 고길덕을 파견하여 와서 건국을 알리고 겸하여 원조를 청했다.
요동의 유보 수보는 정치를 함에 혹독하였다. 고려의 예종 문효대왕의 11년 정월, 동경의 비장이요, 발해 사람인 고영창은 수십인과 술김에 용기를 내어 칼을 들고 울타리 담장흘 넘어 부위에 들어갔다. 등청해서 유수가 있는 곳을 묻고 거짓으로 외부의 군대가 쳐들어 왔다고 하며 대비를 해야 겠다고 청하였다. 수보는 먼저 나오다가 무리에게 죽임을 당하고, 가유수 대공정과 부유수 고정신은 싸웠으나 이길 수 없자 서쪽 문을 뚫고 나와서 요나라로 도망했다. 영창은 스스로 대 발해국 황제라 칭하고 융기라고 개원하니 요동 50여 주를 거느렸다.
<<송사>>에 가로대, 정안국은 본래 마한의 종자들인데 요나라에 망하니 그 족장은 남은 무리를 규합하여 그 서쪽 변두리 땅을 확보하여 나라를 세우고 개원하여 스스로 장안국이라 했다.
개보 3년, 왕 열만화는 입공하는 여진에게 부탁하여 표문을 올리고 공물을 바쳤다. 태종 때 그 왕 오현명은 다시 여진에게 부탁하여 표문을 올리고 공물을 바쳤다. 거기서 요약하여 말하기를 "신은 본래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고 있는 터로 발해의 유민으로서 이 한쪽 구석을 보전하는바"라고 하였다. 태종은 답장에서 요약하여 이르기를 "경은 마한의 땅을 남김없이 모두 남김없이 보전하고 경파의 표를 올리니 운운"이라고 했다. 단공(988-989)으로부터 순화(990-994) 사이에 다시 여진을 통해 표를 올리더니 그 뒤에는 소식이 없다고 하였다.
대진국은 애제의 청태 26년 봄 정월 야율배는 동생 요골과 선봉이 되어 밤에 홀한성을 포위하자 애제가 성밖에 나가 항복함으로써 대진국은 망했다. 2월 병오 요의 태조가 동단국을 세우고 장자 배를 인왕황으로 삼다. 왕은 감로라고 개원하고 홀한성을 천복성이라 개칭하였다. 천자의 관복을 준용하고 12류의 면류관을 쓰고 모두 용의 형상을 그렸으니 바로 대진국의 옛날 제도이다. 숙부 질자를 좌대상으로 삼고 대진의 노상(이름은 확실치 않음)을 우대상으로 삼으며, 대진국의 사도 대소현을 좌차상으로 삼고, 야율우지를 우차상으로 삼다. 나라 안의 사형이하 죄인을 사면하고 해마다 포 10만단, 말 천필을 조공할 것을 약속케 했다.
감로 27년 겨울 경진에 요는 동경 중대성을 쳐서 동단국도 없앴다.
[참고자료]
2011. 6. 16 KBS역사스폐셜,추적! 발해 황후 묘는 공개되지 못하나?
<환단고기>/계연수 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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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사의 종합적 고찰> / 한규철 외 /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00
<다시 찾는 우리 역사> / 한영우 / 경세원 2005
* 앞으로는 사학자들은 지나국이 부른 '발해'라는 표기보다는 대조영이 나라를 세우고 정한 '대진국'으로 표기하는 것이 대조영과 민족사를 모독하지 않는 행위다.